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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an 04. 2020

젊어지는 비결, 독서

- 작가인 내가 꾸역꾸역 책을 읽는 진짜 이유

흔히들 그렇듯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만나면 통성명 후 서로 직업 조사를 하지요...

"뭐하는 분이세요?"

"..작가...."

여기까지 소개를 하면 대부분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아, 그럼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시겠네요... 저는 도통 책을 안 읽어서......."

혹은 "그럼 아는 것이 많으시겠다. 말조심해야겠네요. 저는 아는 것이 없어서......."

직업에 따른 사람들의 선입견이 있죠.

작가에 대해서 한번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볼까요?

    

흠.... 제가 만들었지만.... 저는 작가가 아닌가 봅니다... ㅎ

분명히 책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었지만, <동화 넘어 인문학>에서 고백했듯이 입시를 거치는 동안 독서 습관은 다 망가져버렸고, 그 이후로는 대학에서 갑작스레 쏟아진 지식인들의 어려운 책에 질려버렸지요. 그렇게 공부하듯이 책을 읽다 보니 책 읽는 즐거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소설을 읽다가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죄책감까지 생겼습니다. 즐거움을 느끼면 뭔가 독서가 아니라 오락을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독서란 완전히 개인적인 경험인데, 늘 남의 시선을 의식했던 셈이지요.

   

펭수님

남의 시선에 대범해질 나이가 되었을 즘, 세상에는 책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책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세상이었죠. 다행이라면 제가 여전히 책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에, 직업 상 책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 혹시라도 계실 제 독자들께서는 배신감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좋아하기를 바랐던 것이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 시기까지 제가 말씀드리는 책은 아직도 소설이나 재미있는 책들은 빼고 말하는 것이랍니다. 그 있잖아요.. 어려운 책들... 서지정보센터의 분류법에서 제3행 1번~5번에 해당되는 철학, 심리학, 윤리학,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책들이요.............. 하.....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그리고 직업을 갖게 되면서 시간이 더 없어지자 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은 더 가벼워졌지요. 피곤하다는 이유로 책을 펼치지 않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고, 늘 갖고 다니던 핸드백 속 책이 갑자기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재미로 읽었던 책들마저 꺼내지 않았죠. 넘겨지는 종이의 기분 좋은 질감을 즐기던 손끝은 이제 휴대폰 액정을 미끄러지는 데만 쓰였습니다. 그때 책을 안 읽는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휴대폰에 tv에 눈길을 잡아끄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로 흘러 다니다 보면 잠이 모자라 다음 날 근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시간이 없어지더라고요.

그즈음 계속 생각나는 아이 이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MOMO'.  

걸그룹의 어여쁜 그 가수 말고... 미하엘 엔데 님이 우리에게 보내준 전사 모모  말이에요..

<모모> 일러스트, 비룡소

시간을 훔치는 회색 인간들과 싸우는 모모를 그렇게 응원했으면서, 나도 모르는 새 내가 회색인간들에게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몇 가지 증세 때문이었습니다.


 1. 그 많은 실시간 검색어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모르겠음

 2. 그 많은 동영상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모르겠음

 3. 그 많은 콘텐츠를 보았는데, 아무런 생각이 없음

 4.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감

 5. 보면 볼수록, 유아적인 반응만 하게 됨. 좋으면 GO, 싫으면 STPO.

 6. 싫은 것을 참고 보거나 듣는 인내심이 점점 줄어듦

 7. 세상 일에 관심이 없음

 8. 고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나도 모르겠음


1번부터 4번까지는 회색 인간들에게 조종을 받는 징후였습니다. 저는 껍데기 인간이 되어가는 중이었죠. 이 껍데기 인간에 대한 경고는 사실 아주 많은 철학자들이 오래전부터 경고를 했었습니다. TV나 동영상이 아니어도 인간은 언제든 골치 아픈 두뇌를 누군가에게 줘버릴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이지요.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의 정보를 즉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편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명령은 자기가 바꿀 수 있습니다. 어차피 자신이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확실한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6쪽


에리히 프롬을 위시한 철학자들이 생각 없이 사는 것을 포기하는 일의 위험함을 평생토록 경고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생각을 포기해버리면 그 사람은 늙고, 그러면 그 생각과 젊음의 에너지를 갈취해가는 세력이 생긴다는 것이죠.


  프로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억압된 것은 외부에서 회귀한다, 라는.
- 같은 책, 218 쪽


외부에서 회귀하는 것,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치즘, 인종주의, 제국주의였죠.

현재 전 세계를 출렁이게 하는 극우의 바람이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도, 제가 경험한 저 1번~4번까지의 증세 때문입니다.

중앙일보

하지만 제가 그런 세계정세 때문에 다시 책 읽기를 시작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저는 1번부터 4번까지의 증세로 인해 생긴 5번부터 8번까지의 증세 때문에 덜컥 겁이 났을 뿐입니다.

싫은 것을 인내하기 힘들어지고, 좋은 것에만 기울어지다 보니, 골치 아픈 세상 사에 눈 닫고 귀 닫고 싶어 졌습니다. 좋은 뉴스만 골라 듣고, 우리나라 만만세라는 소식만 듣고, 세상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뉴스는 얼른 닫으니까 알고리즘이 알아서 그런 소식들만 보여주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상이 판타스틱 원더랜드였습니다. 나는 재벌이 아니고, 나는 이 세상의 룰 메이커가 아닌데, 마치 세상을 움직이는 0.1%의 사람인 양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내가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한 그들이 만들어가는 룰에 대해서도 관심이 덜해졌고, 그런 것들이 있기나 한지 사실 무관심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약해지는 체력과 발맞추어 생각하는데 에너지를 쓰기가 싫어졌습니다. 다 귀찮아졌던 것이지요. 나이 불문, 나랑 의견이 다른 사람은 피하고, 달게 들리는 것에만 열리는 귀를 발견했습니다..... 알겠더라고요, 늙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대학내일

남의 말 죽어라 안 듣고, 걸핏하면 벌컥 화를 내고, 언제나 '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남한테는 상처 받을 말을 쏟아내면서 자신은 남의 말 꼬투리 하나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가짜 뉴스를 믿고, 심지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혐의가 있을 거라고 고집하면서도 사실 확인은 거부하는 노인들.

그들도 말랑말랑한 볼을 가진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어요.

운동하지 않으면 관절과 근육이 퇴화하는 것처럼,

생각도 하지 않으면 흐물흐물 녹고 뇌 속의 뉴런들은 다 꺼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수조 같아서 신선한 물을 붓지 않으면 제 아무리 넓어도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늙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존경하는 업적을 냈던 지식인들이 추하게 늙는 이유를, 저는 조금 알아차린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 정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저는 죽을 때까지 눈빛만큼은 미하엘 엔데 같이 영원히 젊은 눈빛을 간직하고 싶었거든요.  

미하엘 엔데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게 되면 책과 내가 온전히 하나가 된다.  
-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정민 지음, 보림출판사, 168쪽


독서가 젊음의 비결인 이유는 뇌를 단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꼰대가 되는 것을 막아주지요.

꼰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어가 언제나 '나'이고 기준도 항상 '나'라는 것입니다. 즉, 상대에 대한 상상력도 없고, 상대의 말을 들을 의지도 없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죠. 그저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만 마련되면 된다는 식입니다. 마치 영유아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직장에서 나이 많은 높은 지위의 상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주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퇴직 후에 상실감에 살 떨려하며 적응에 힘들어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저는 독서의 다른 말이 귀 기울이기라고 생각합니다. 권, 짧아도 100페이지 내외지요. 완독 한다고 할 때, 그 속의 말을 온전히 듣는 행위가 바로 독서인 셈입니다. 정보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그 책에 마음을 완전히 열고 책 속에서 헤엄을 치고 나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친구 하나를 얻게 되기도 하죠.


이처럼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사이드는 말합니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 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 활력을 느끼게 하고, 흥분시키는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
- <읽는 인간>, 오에 겐자부로,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48쪽
Frederic Leighton, Flaming June, 1895, Museo de Arte de Ponce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영원한 젊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단, 늙음이 완숙, 능숙, 배려, 여유 같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요.

삶에 큰 기대가 없거나 오히려 빨리 늙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순수함이나 명료한 정신마저 쇠퇴하거나 썩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죠.

하지만 나이 들수록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듯이, 생각과 정신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새해 계획에 독서를 집어넣는 것이죠.

이게...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연령별 독서 통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들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판이 망하고, 세상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돌고 있죠.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 한두 번 힘이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역시 책을 읽으며 용기를 낼 수 있었죠.


Mundus senescit. 세계는 늙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위의 책, 231쪽


저 말이 언제 어디에서 유행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5세기, 유럽이라고 합니다. 5세기면 유럽 사람들이 연도를 세기 시작한 지 겨우 500년인데 너무 빠른 좌절이라고 (꼰대처럼 "나처럼 적어도 2천 년은 살아봐야..."라고) 혼이라도 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런데 이렇게 세계가 끝났다는 푸념은 거의 매 년 매 세기마다 있었다고 하네요. 문학이 죽었고 출판이 죽었다는 말도, 인쇄술이 시작되자마다 시작되었다고 하고요....


대충 양보하여  (러시아 인구의)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중략)
여러분은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가 소설을 썼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 위의 책, 250-251쪽


 

도스토옙스키


외눈박이 마을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놀림을 받는다는 것처럼, 혼자 늙지 않으려고 정신을 벼리는 사람은 다른 이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에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나이 들수록 많아지니까요. 아닌 이유에 대해 토론하고자 하면 어느새 혼자 튀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젖은 독서를 하고 나면 행동이 변하지 않을 수 없죠. 몸은 늙었을지 몰라도 눈빛과 마음은 여전히 젊으니까요. 그리고 젊음은 언제나 약하고 어리고 정직한 것들 편이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다 포기하고 그냥 늙기를 선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한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 같은 책, 271쪽
 

딱히 망해간다는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그저 책을 읽어 젊어지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워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해 계획으로 독서를 권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함께 젊어지자고 말이지요. 벤야민의 말처럼 캄캄한 어둠 속이라도, 누군가 사라락,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면 외로움이 좀 덜하지 않을까 해서요.

영화 <코코>의 한 장면


정신을 젊게 해주는 독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방법이 갑자기 눈에 띄어 올립니다.

저도 하나 정해봐야겠어요. 겐자부로 할아버지처럼 단테의 <신곡>을 다시 잡아볼까.......... 흠... 그런 생각이....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 <읽는 인간>, 위의 책,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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