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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Jul 09. 2024

1인치의 장벽을 넘으면 벌어지는 일

- 포스트잇과 볼펜 하나면 충분한 장벽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제77회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기억에 남는 한 마디라면, 단연코 봉준호 감독의 이 말을 들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막 읽기를 귀찮아하는 미국 관객을 향한 팁이었지만, 살다 보면 작은 귀찮음 때문에 커다란 것을 놓칠 때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압니다.

 책 읽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책 읽는 경험에도 영화의 자막처럼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가 장벽이 될 때가 있습니다. 책에는 자막이 없으니 장벽높이가 1인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듯이 참기만 하면 되지도 않습니다. 장벽을 넘어서는 방법은 영화 보기보다는 살짝 귀찮기도 하죠. 하지만 장담하건대 이 장벽을 넘어서면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년의 고독> 표지

두 표지를 읽고 '기술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힌트를 얻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작인 이 책들을 저는 세 번의 도전 끝에 완독 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도 아니고 이해하기 힘든 사상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책장을 덮게 만든 이유는 각각의 책에서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물이 너무 많고 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저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러시아 소설들입니다. 서양 소설에 나오는 이름들은 꽤 긴 편이지요. 특히 귀족이 나오는 <명작> 작품들을 보자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깁니다. 하지만 긴 이름 따위는 러시아 소설의 장벽 앞에 아무것도 아니죠. 특히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 대부분이 장편이라 포기를 하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자조한 적도 있습니다.

<초판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내지, 도스토예프스키 저, 장한 역, 더스토리


 요즘은 출판사에서 이렇게 친절하게 인물의 이름을 정리해주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예전의 책에 비하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러시아 이름의 특징 때문에 이 인물 소개가 무색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러시아 특유의 '애칭' 때문입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민혁'을 '혁아~'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름의 한 글자를 이용한 애칭이라거나, 일본처럼 나이와 친밀도에 따라 성이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라면 외국인 독자 입장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의 애칭은 그 수가 많기도 많고, '알렉산드르'의 애칭처럼 원래 이름에는 한 글자도 들어있지 않은 말들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소설의 특성상 만나는 인물들과의 관계와 친밀도의 경우가 무한하니 한 인물을 부르는 말들이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그래서 책 읽기는 진도가 안 나가고, 이 인물이 누구였는지 몇 페이지나 뒤로 가서 확인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죠. 만일 식음을 전폐하며 통독을 하지 않는다면, 며칠 뒤 책을 다시 들었을 때, 겨우 머리에 넣어둔 각 인물들의 애칭이 완전히 새롭기 일쑤입니다.

저는 이 장벽을 정말 못 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한 방법은 기본 인물 이름 옆에 애칭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적는 것이었죠. 그래서 누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 정식 이름으로 애칭표를 찾아보고 나서야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백 년의 고독> 내지, 마르케스 저, 조구호 역, 민음사

또 하나의 장벽은 인물 간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러시아 소설과는 달리, 우리나라 장편 혹은 대하소설을 읽을 때도 맞닥뜨리기 쉬운 장벽이죠.

하지만 저에게 아직까지 가장 높았던 장벽은 바로 <백 년의 고독>이었습니다. 저는 안정효 작가의 번역인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는데, 후에 민음사 책의 이 가계도를 보고 괜히 억울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읽을 때는 저런 가계도가 없었거든요. 정말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악의 가계도였습니다.

왜인지는 이 그림만 보셔도 알 수 있습니다.


퀴즈) 1. 이 가계도에서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몇 명일까요?

        2. 이 가계도에서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몇 명일까요?


레메디오스나 우르슬라 같은 이름은 장벽으로 치지도 않겠습니다.

휘諱라 하여 윗사람이나 귀한 사람의 이름을 피했던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존경과 사랑의 뜻으로 윗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짓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예전 책에는 '대大 슈트라우스', '소小 슈트라우스' 같은 명칭도 흔했습니다. 현재는 '~~ 주니어'라고 하면 대충 '아, 부모나 조부모 정도의 이름을 따른 것이겠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책 속 배경이 고립된 한 집안의 이야기인 데다 근친상간도 심심찮은 집안이라 이름이 계속 겹칩니다. 이것은 약간 스포일러에 속하지만 한 이름을 가진 조상과 후손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손자가 활약하는 식이니, 다른 인물이 그 이름을 불렀을 때 할아버지를 부르는지 손자를 부르는지 헷갈리는 것이죠.

이 장벽을 넘은 방법 역시 스스로 표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읽는 시점에 '아직도 죽지 않은' 인물의 상태를 적기도 했고요.


요즘에는 독서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 주려고 출판사에서 위와 같이 친절한 페이지를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포스트잇처럼 붙였다 뜯는 것이 쉬운 메모지와 펜 하나를 권합니다.

스스로 애칭표를 만들고, 가계도를 그려가면 머리에 한번 더 새겨지는 효과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책갈피 대신 끼워놓고 필요할 때 바로바로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때로 업그레이드도 시켜가면서요.

by, DALL.E

더불어 또 한 가지 팁은, 몇몇 책들은 어릴 때 완독하도록 해주시면 좋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외국어를 더 쉽게 습득하듯이, 복잡한 인물의 이름을 익히는 것도 어릴 때가 쉽거든요.


꼭 독서만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들이 있죠. 관용어나 이름 명명 방식 같은 것은 문화적 특성이 많이 드러나는데, 특히 그 사회의 전통 신화나 종교가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회가 유일신을 믿든 아니든 수많은 이름과 가계도의 장벽은 어마어마하죠.

가장 대표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불경, 쿠란, 힌두 신화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책들은 간략하게 줄인 것이어도 좋으니 어린 시절에 읽는 것이 여러 모로 좋습니다.

소설 속의 인물이나 가계도는 책장을 덮은 뒤 잊어도 손해가 없지만, 이러한 문화적 상징들은 잊지 않는 것이 유리하니까요.

by, DALL.E

운 나쁘게 어린 시절 이 만신들을 익히지 못하셨다면, 좋은 메모지와 펜을 드시기 바랍니다. (유감을 표하면서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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