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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Mar 10. 2022

나의 하와이(2)

-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일 것이다, 부모님의 체력은.   

하와이를 가기 전에 미리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1. 나의 역할은 가이드.

2. 내가 원하는 일정은 딱 하나만.

3. 부모님이 무리하지 않도록 강권하지 말 것.


하와이는 제게도 꿈의 여행지였습니다.

하와이를 배경으로 혹은 하와이 풍으로 만든 일본 영화들도 꽤 영향을 주었지요.


<호노카와 보이>, <안경, <수영장>


하와이, 일본의 어느 섬, 태국 치앙마이..가 배경인 영화들이지만,

전부 하와이에 투영되는 환상이었습니다.

쉼, 치유, 청량.... 그런 것들이요...


하지만 이전에도 부모님과 여행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런 환상을 품으면 괴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이드라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죠.

미리 국제 운전면허증도 만들고, 우버 사용법도 알아내고, 여행상품도 쉬운 것들로만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여행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예약해놓으면 할인도 되고 정보도 배울 수 있어서 좋지만,

그보다는 어른들을 거리에 세워두고 헤맨다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준비를 했는데도 호놀룰루에 도착하자마자 계획은 틀어졌습니다.

편안한 좌석으로 오셨으니 렌터카를 찾을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은 무너졌지요.

누워서 오셨건 좁게 오셨건 10시간의 비행 자체가 부모님의 체력을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창백한 두 분에게 차마 렌터카를 빌려서 숙소로 가자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호놀룰루 공항에서 시내에 있는 숙소까지 가기 위해 우버앱을 처음으로 써보았지요.


 

호놀룰루 공항


숙소 주인에게 부탁하여 빠른 입실 후, 짐을 풀기도 전에 부모님은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시더군요.. ㅎ

특히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신 아버지는 파자마로 갈아입으신 뒤 높은 침대가 차지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나오실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요....

 

오후 3시도 안 된 한낮이었지요...

코끝으로 전달되는 딱 좋은 습기와 온기에도 불구하고,

시력을 단번에 끌어올린 청량한 시계에도 불구하고,

성층권까지 보일 듯한 푸르른 하늘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은 우리 집과 다를 바 없는 방 두 개, 거실 겸 주방 하나, 욕실 하나인 에어비앤비 숙소만 확인해야 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와이키키 해변 앞이니까 슬슬 산책만 다녀오실까요?"


태양이 약간 황금빛으로 변했을 때, 좀이 쑤신 저는 슬쩍 말을 꺼내봤습니다.

동생이 항상 '어린 신부'라고 놀리는 어머니는 선뜻 제 편에 서주실 줄 알았어요.

그러면 한 시간 이상 누워계셨던 아버지도 못 이기는 척 일어나실 거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하와이 숙소에서 저의 말은 허공을 떠돌기만 할 뿐, 어디에도 흡수되지 못하더군요.

아마도 한국어라서 그랬을지도.......     


'아니, 하와이에서의 하루를 이렇게 보내다니. 이럴 거면 집에 있는 게 더 편했잖아!'

제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몇 번이나 제1원칙을 떠올려야 했지요.

뉘엿뉘엿 지는 해가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했어요.


"밖에 나가 식사하는 것은 귀찮으시지요? 쌀이라도 사러 나갈까요?"


이 말에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래, 집에서 대충 때우자."

어머니: "그게 편하지."


하지만 두 분 모두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은 없지 뭐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저 지금 쌀 사러 갈 건데, 같이 안 가실래요?"

"쌀을 팔까? 여기 미국인데?"

"가까이에 식료품 마트가 있으니까 팔 거예요. 가실래요?"


이 말에 시장 구경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드디어 거실 소파와 떨어지셨습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죠.

어찌 되었든 하와이 속의 침대니까 괜찮다, 이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와 길을 나섰습니다.

<호노카와 보이>


그리고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죠.

바로 헤매는 거요.

아니, 헤맨 것은 아닙니다.

구글 지도를 보니 숙소에서 식료품 마트까지 도보로 13분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왕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제 잘못이었죠.

지금은 운동을 많이 하시지만, 그때만 해도 어머니가 제일 싫어하시는 게 걷는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5분도 안 지나 지친 기색이 다분한 어머니 앞에서 마음이 초조했죠.


"야, 여기 들어가 보자."

"...거긴 편의점이에요."

"그래도 일단 들어가 보고 없으면 딴 데 가면 되지."   


편의점이라 굳게 믿으며 몇 개나 지나쳐버린 가게는 ABC 마트....

하와이 여행객이라면 다들 가보았을 그 편의점에서 쌀을 팔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알고 보니 쌀뿐 아니라, 하와이안 셔츠, 튜브, 선글라스까지 없는 게 없더군요.


"여기 라면도 있네! 여기 쌀 있다! 얘, 여기 와 봐라. 이것도 있다!"

보물찾기 하듯 마트를 돌아다니시던 어머니가 '심봤다!'처럼 외치신 한 마디.

네, 소주였습니다.

아버지를 침대에서 일으킬 궁극의 음료였죠.


우리는 그렇게 사냥에 성공한 이방인처럼 ABC마트를 떠나 숙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는 어머니가 기대한 밥맛 좋은 한국 밥통은 아니지만,

전기로 밥이 되는 제품이 있었지요.


밥에, 어머니가 집에서부터 가져오신 김치와 장아찌, 라면.......

그리고 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드디어 창밖의 하와이 하늘을 보게 만든 소주!

그렇게 하와이의 첫날이 지나갔습니다.


"이건 하와이의 공기야!" 를 되뇌며

저는 가이드로서의 각오를 다잡았지요.

그날 저녁에 저는 렌트카를 취소했습니다.

렌트카로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는, 게다가 초보 딸내미의 운전에 신경까지 쓸 체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그날, 새삼 깨달았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 늙어지면 못 노나니

                                      - <노세 젊어 노세>, 미스터태평, 타이헤이, 1950년대


오래된 노래 가사는 슈퍼 리얼리즘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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