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조금은 다른 이유...
배지근한 불운의 습기가 원인 같습니다.
아, 입밖에 내고 말았습니다.
귀신이 무서워 어둑한 음지를 걸을 때 발길 빠르게 한눈 필지 않는 건 서로 알아차리지 않기를 바라서죠.
하지만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감각만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그래서 입 밖으로 내놓은 불운이 두렵습니다.
불행이 이니라 불운...
아마 사람이라면 다 느끼고 있을 겁니다.
뉴스에선 여전히 물가상승 인플레 성장둔화에 대해서만 유독 호들갑을 떨죠.
뉴스도 기업에서 만든 것이니 매출감소만 한 재앙이 없을 듯도 합니다.
하지만 먼 지층에 있던 지각의 뒤틀림은 이제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광산 속 키나리아 같은 존재들은 그 진동에 더 예민하게, 더 심하게 잃고 있지요.
그래서 예술가는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기쁨의 시대에 살았거나
종교적 확신으로 밝기만 한 작품도 있지요.
환한 작품이 주는 기쁨, 초월이 주는 환희가 부럽습니다.
사실 모든 토끼, 카나리아가 다 불운을 감지하는 데 쓰이진 않으니까 말아죠.
하지만 모든 시대 어둡고 숨 막히고 축축한 곳에 있던 존재를 기억합니다. 죽음이 곧 전조가 되었던 이들...
카프카, 이상, 허초희, 뭉크, 케테 콜비츠, 키르히너, 더 도어즈, 김정호, 기형도, 권터 그라스, 김수영.......
저도 말하고 싶습니다.
산불과 홍수, 가뭄과 사막, 남북극의 기온
전쟁과 위기와 혐오와 차별의 확대, 그리고 시야각을 좁히고 있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가여워하지 못한 여린 영혼에 대해서요.
그래서 저도..
잠수함에 산소가 부족하다는 걸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기에 죽음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서 말하고 싶어요. 여기, 불운을 불러들이는 사람들 좀 보라고. 저기 스러지려는 사람 좀 잡아달라고...
하지만 마비되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시간들.
남과 어둠과 의미를 구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삶.
저도 손쉬운 시간으로, 껍데기로 화려한 공허가 부럽기만 합니다.
같이 소리쳐준다면
같이 힘들다고 눈 마주치면 카나리아와 토끼가 죽기 전에 살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오늘도 누군가의 부고와 누군가의 한을 밟으며 하루가 끝나깁니다.
평안할 리 없는 죽음을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