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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Apr 07. 2023

치고 올라갈 바닥은 없으니

- 무중력을 깨닫기 위하여

지난 달에 오에 겐자부로 작가가 돌아가셨습니다.

빛으로 끌어안은 장남, 히카리를 두고.

「개인적 경험」으로 작품의 새로운 길을 연 그지만, 문학 전공인 저도 읽기 어려운 글입니다.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친구가 아닌 사람에겐 읽히지 않습니다.

장남 히카리의 탄생으로 두려움과 비겁함과 분노와 체념, 그리고 환희까지 개인적 경험을 얻은 작가는 이후 흔히 사소설이라 분류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밥 먹고 히카리와 산책하고 주변의 일을 듣고... 그러다 어느 새 아득히 사고의 마루를 훌쩍 넘어가 있습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문장을 놓치면, 작가의 이야기를 놓치고 맙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번역본만큼이나 꽉 짜인 고백의 흐름입니다. 의식의 흐름과 다른 점이란 오에 겐자부로가 기본적으로 말을 걸기 때문이죠. 그의 책을 읽는다는 건 인생과 일상을 곱씹는 그와 같은 호흡으로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귀 기울임을  친구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나요? 그러니 노벨상 작가라고 무턱대고 다가가면 포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작가의 반복되는 느린 일상을 진심으로 함께 해야 하다니...

작가로서는 읽을수록 손해였던 것이, 요즘의 작가는 서비스업이라는 걸 자꾸 잊게 했기 때문입니다.

IP가 될 만한 걸 생각하고 강력한 플롯을 만들어 다음 시즌에 목매도록 세계관을 만들어내야만 "작가" 타이틀을 얻게 되는 게 요즘 인심이죠. "사이다"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오에 겐자부로를 권했다가는 손절당할 지도 모를 일이니 이래저래 오에는 안 팔리는 작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존경받을 만한 친구처럼, 저는 가끔 오에를 읽습니다. 등단도 못하고 생활비도 벌지 못하던  시절, 대학생인 동생이 사준 오에 겐자부로의 책들이 꽂혀 있는 덕분이죠.

너무 울어 머리가 아픈 날이나

나아갈 구멍이 없어 한숨도 나오지 않을 때,

미지근한 황톳물이 담긴 욕조 같은 오에의 문장으로 들어갑니다.

비애의 감정을 바닥에 깐 인생,

차마 버릴 수 없는 것들로 고통이라 할 법한 일들로 고생하는 일상 속 노작가도 독자처럼 오래 머 수 있는 경전 같은 책을 수십 번째 읽고 있습니다. 딘테 같은 책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가 차마 버릴 수 없는 건...

히카리, 젊은 이상이 함께 꺾여나간 친구들, 미군 점령기에 마을을 수호하던 숲과 어머니신, 그리고 전범으로서의 모국 일본과 현상유지를 택한 천황제 니라가 가진 죄의 무게, 평화헌법 같은 것입니다.

혹자는 평화운동가로서, 노벨상 수상자로서 그의 소설이 결국 일본의 피해에 천착하고 자국 전설의 생명력을 옹호한다고 비판합니다.

동학농민운동 이래, 뜻을 갖는 순간부터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려야했던 나라의 사람으로서 그 비판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쓰는 것과 읽는 것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집앞에서 확성기를 틀어대는 우익들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고,

특별한 아이인 히카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그의 삶도 인생의 배경에 완전히 묻히지 않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을까 힙니다.


그의 책은 재미와 거리가 멀지만

삶 자체가 투쟁이거나

차라리 반동으로 차오를 날을 꿈꾸며 기라앉기만 할 때

 그 시절을 사는 법을 보여줍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울거나 한숨 쉬지 않고 히카리와 함께 일상을 해치워가면서 때로 웃고 있습니다. 그 삶은 투명한 천연색이 아니라 비애가 엷게도 짙게도 밴 황색입니다. 그래도 끝없는 허우적거림으로 가라앉지는 읺습니다.

블꽃으로 타버리지도 않지만, 오에에게 자국의 범죄를 일갈해주던 어느 시인처럼 변절하지도 읺았습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영면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뭐랄까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습니다. 히카리는 음악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나이도 충분히 먹었으니까, 더 이상 슬픔이 깔려있던 이 삶을 조금은 안심하며 떠났다는 생각에요....


저도 이제 삶의 무서움을 압니다.

모든 힘 중에 중력이 가장 세서

자력이든 타력이든 반대 빙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네 삶은 언제까지나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깨딜았습니다.

더구나 세월이 흐를수록 문제는 복잡해지고 타력을 나눠줄 친구도 사라지며 포기는 쉬워 보이니까요.


그럴 때 오에를 꺼내봅니다.

최선을 다해 부딪쳐 삶을 살아간 그 기대감 없고 힘빠진 밀투를 듣습니다.


함께 허우적거리다 보면 언젠가 얕은 기슭에 도착하지 않을까 하며...

그게 오에 같은 기슭일지라도 마지막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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