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한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는 당시 철학서로는 이례적으로 독자들의 뜨거운 공감과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독일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하고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 전체 생산성을 극대화해가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성과사회 속에서 개인은 ‘성과주체’가 되어 자기착취의 양상을 띤다고 지적합니다. 즉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결과가 낳은 사회이고, 피로사회는 곧 성과사회의 다른 말입니다. 한병철 교수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 1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떠올려봅니다. 『피로사회』가 놓여있던 서점의 매대에는 번아웃과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들이 들어찼습니다. 어쩌면 피로사회에 이어 ‘자기돌봄’이 필요한 시대로 더 극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의식은 충분히 가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입니다. 최근 수많은 ‘번아웃 호소인’들 사이로 과연 ‘경영’은 더 진화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영이 구성원들에게 충분히 일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요? 피로사회의 이면엔 오히려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경영의 오랜 관행이 자리 잡고 있진 않은지 질문해 봅니다. 리워크팀은 그간 성과의 개념을 결과가 아닌 ‘과제해결을 위한 솔루션’으로 정의해왔기에 이번 글에서 저는 현대사회는 ‘성과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성과다운 성과를 창출하기 어려운 경영환경이 보편화된 사회, ‘성과상실의 사회’로 규정하고 무엇이 조직과 개인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1월 30일, 도요타의 부품 전문 자회사인 도요타자동직기가 디젤 엔진의 성능을 조작한 것이 드러나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차량의 출력을 높게 나오게끔 ECU(전자제어장치)를 조작한 것인데요. 이에 따라 렉서스, 랜드크루저 등 10개 차종의 출하가 중단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건데요. 작년엔 도요타의 자회사 다이하쓰에서 35년간 174개의 데이터를 조직했다는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품질경영의 도요타에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이런 논란의 원인으로 ‘목표지향적인 문화’가 꼽힙니다. 신차개발에 필요한 기간과 인원이 부족해도 양산일정을 준수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무조건 이를 준수해야 했던 것이죠. 품질경영의 상징, 세계판매량 1위와 같은 화려함의 이면엔 이런 어두운 면이 존재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꽤나 익숙하고 보편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장면이 나타나기까지 성과를 상실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했을까요?
1. 스스로 목표를 수립하라고 지시
2. 목표달성 수준에 따라 평가받기에 달성하기 쉽거나, 측정하기 쉬운 결과나 활동들을 목표로 설정
3. 조직장은 더욱 도전적인 목표를 잡으라고 강요하거나 목표수준을 탑다운 형태로 조정
4. 구성원의 직무오너십, 직무몰입도가 약화되고 목표수치를 채우는 활동에 치중
5.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뒤로 밀려남
이와 같은 목표중심의 성과관리시스템은 많은 조직에서 균형상태(경로의존성)를 이뤄 운영되고 있습니다. (뉴스레터 29호 참고 : “OKR 비판” 경영계획이 ‘목표’가 아닌, ‘전략’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 참고) 마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쿼티키보드 배열보다 20% 더 빠르고 치기 편하다고 알려져 있는 드보락 방식이 1930년대에 개발되었음에도 이미 표준화되어 있는 쿼티자판기가 익숙해서 바꾸기 쉽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당연하게도 조직의 성과관리시스템은 키보드배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말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위와 같은 현상에 대해 마커스 버킹엄, 애슐리 구달은 『일에 관한 9가지 거짓말』에서 우리는 보통 일관성 있게 일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목표가 필요하다고 가정하지만, 이는 틀렸다고 말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더 흔하게 직면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은 미션, 과제, 전략과 같은 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부족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죠.
성과상실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균형상태로 전환하려면 다른 차원의 대안, 선순환 메커니즘이 필요합니다. 아래 ‘성과관리시스템’ 도식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1. ‘일의 크기’ 개념으로 직급개념 회복 / 밴드제 운영을 통해 기대성과에 따라 누적적으로 인상률을 적용하는 공정한 급여제도로의 변화(성과평가 결과가 기본급 결정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음) / 성과에 대한 인식, 가치판단,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를 통한 성과평가 방식 도입 등 성과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조성
2. 구성원에게 방향을 전달해 줄 수 있는 단위조직 차원의 미션, 과제, 전략의 명확성 확보 (전사→부서→팀 차원으로)
3. 구성원 각자 직무R&R안에서 오너십을 갖고 성과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함으로써 단위조직의 전략과 정렬(align) 강화
4. 구성원이 성과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조직장과 1on1, 상시 360도 피드백(AAF : Anytime Anyone Feedback)을 통해서 성과창출에 필요한 맥락을 충분히 소통
5. 목표달성도에 의한 평가가 아닌 성과창출을 통해 나타난 결과(임팩트)와 성과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토대로 성과를 인식하고 평가함으로써 고성과에 대한 학습이 일어남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숫자를 채우는 데 급급한 목표중심의 성과관리는 구성원을 ‘성과상실’ 상태로 이끌게 됩니다. 반대로 과제와 전략 중심의 성과관리시스템은 고객의 입장에서 가치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만들고 변화시킬 것인지 그 ‘의도’와 ‘가설’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구성원들은 스스로 일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고, 조직의 정렬은 더 강화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새로운 성과관리시스템을 안착하는 과정에서 제도의 변화와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조직장의 행동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조직장의 이해와 공감수준이 낮다면 실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이와 관련해서 조직장에게 필요한 마인드셋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제시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넷플릭스의 '통제가 아닌 맥락으로 리드하라'(Lead With Context, Not Control) 입니다. 넷플릭스의 조직장들은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하려고 하는 대신 구성원들이 좋은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맥락과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초점을 둡니다. 만약 구성원이 아쉬운 의사결정을 했다면, 구성원을 탓하기보다는 조직장으로서 경영계획(미션, 과제, 전략)에 대한 맥락을 충분히 커뮤니케이션을 했는지를 먼저 자문해 보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성원 모두가 진짜 성과를 창출하는데 유리한, 다르게 말하면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직무에서 의사결정 능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중요한 태도인 것이죠.
많은 전문가가 한국의 기업들이 예전처럼 벤치마크를 통해서 성장하는 패스트팔로워가 아니라 이제는 남들이 안 한 것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구성원 개개인이 조직의 성과창출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변화를 위한 트리거를 만들어내려면 어떤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이, 최근 생성형 AI의 급격한 발전으로 비숙련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올라가면서 지식노동자의 ‘성과’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처음 ChatGPT가 개발되었을 때 일하는 사람에게 100명의 중학생 비서가 있는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면, 이젠 그 중학생이 고등학생을 넘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대학원생 100명이 나의 일을 위해서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지식노동자에게 ‘성과’란 이전과 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변화들은 성과의 개념을 ‘과제해결을 위한 솔루션’으로 더욱 명확히 하고, 성과창출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더 집중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과창출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더욱 과감하게 걷어내는 과정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얼마 전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과묵한 성격의 중년 남성인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에서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하찮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공중화장실 청소일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인지 ‘히라야마’는 이 일에 진심입니다. 자신만의 루틴을 갖고 일하며, 청소를 더 잘하기 위해서 청소도구를 직접 개발하기도 합니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지만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스스로 일궈갑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5년 전 『피로사회』는 현대사회가 자기착취적이라고 비판했지만, 만약 그것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주체 역시 결국 개인과 조직이라는 생각.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꼭대기로 무한반복적으로 밀어올려야 하는 시시포스(Sisyphos)가 행복하지 않다고 단정지을지 모르지만, 사실 시시포스는 행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리워크팀은 앞으로도 시시포스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 그러기 위해 필요한 인사관리시스템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탐구하고, 통념에 도전하고, 현실에서 더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