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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2. 2021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


<시선으로부터, by 정세랑 장편소설/문학동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의 책 띠지로 장식된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할머니 심시선을 향한 자손들의 애모 곡이다.

 이 소설은 참 특이하다. 첫 시작은 대하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심 시선의 가계도로 출발한다. 일제강점기, 격동의 시절을 살았던 심시선이 두 번의 결혼을 하며 얻은 자손들, 그녀의 궤적을 따라가되 각 자식들, 손자의 삶들이 얼기설기 얽혀져 있다. 뚜렷한 갈등 없이 자손들의 소소한 갈등들이 조금씩 불거져 나온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보다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실 이 소설은 장편 소설이라기보다는 대하소설의 프롤로그의 느낌이 물씬 든다. 긴 대장정을 준비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고서는 정세랑 작가가 이렇게 각각의 인물의 삶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할머니 심시선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큰 뼈대는 심시선의 일생이니까. 이 책의 제목이 ‘시선으로부터,’라 지은 것도 그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 심시선의 ‘일생’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심시선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독자들이 이 인물에 몰입하기에는 사건이 너무 약하다. 게다가 주요 인물인 심시선은 작품 초반에 너무 일찍 죽어 버린다. 우리들은 그녀의 삶을 직접 공감하고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보다는 한 단계 건너 그녀가 쓴 글과 각각의 관점을 지닌 자손들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와, 심시선의 멋진 삶이었다’라고 느끼기보다는 ‘뭐, 그래서?’라는 찜찜한 기분으로, 덜 닦인 설거지 더미를 개수통에 남겨진 기분으로 이 책을 덮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첫째 딸 명혜가 어머니의 제사 10주기를 하와이에서 지내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심시선이 젊은 시설을 보냈던 하와이, 그렇게 하와이 여행을 준비하던 중, 마티아스 마우어가 그린 심시선의 누드화,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언 티츠> 가 호놀룰루 전시관에서 전시된다는 기사를 접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가족들은 각자 훌라춤을 배우거나 서핑을 배우는 등 각지각색으로 하와이의 여행을 즐긴다. 그리고 아주 큰 사건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이 누드화 전시회도 큰 갈등 없이 무심하게 전개된다. ‘우리 할머니는 그럴 수 있어.’ 그냥 그 정도의 반응으로. 시종일관 이 소설은 제 3자의 시선으로 가족들의 삶을 엿보기만 한다. 일제강점기 격동기에서 하와이로 사진 신부로 건너간 할머니와 유명한 독일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Matthias Mauer)와의 갈등도, 그녀의 첫째 딸 화수와 염산 테러 사건도, 규림의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도, 명준의 이탈리아 여인과의 첫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소설이었으면 엄청나게 큰 감정 몰입으로 작품 끝 무렵이 되면 감정이 너덜너덜해질 텐데, 이 소설은 끝날 때까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어느 장면에서 울어야 할지, 어느 장면에서 가슴을 졸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작가의 대하소설에 대한 노림수 일지, 아니면 내 감정이 메마른 탓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혼돈스러웠다. 가냘픈 동양여성 심시선과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마티아스의 삶은 충분히 가슴 졸일 장면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워낙 심시선이 쿨하고 냉정하여 그녀를 동정하기보다는 ‘음, 그렇구나’라며 그냥 스쳐 지나게 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요즘 소설은 ‘가벼운 쿨함’을 전제로 읽어야 하는 걸까? 내 취향을 의심하게 만드는 책, ‘시선으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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