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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Dec 15. 2022

필라테스에서의 마법의 시간, 5초

 “자, 이제 5초만 더 견뎌볼까요?”

약속했던 하체 운동 횟수가 끝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필라테스 선생님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몇 세트씩 반복된 운동으로 땀이 온몸을 적시고 숨 가쁜 호흡으로 이미 심장은 터질 것 같다. 통제력을 벗어난 내 신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으로 두 눈이 자꾸만 감긴다. 순간 고민한다. 그냥 포기할까? 아니면 버틸까?

 

 필라테스에서의 5초는 참 재미있는 시간이다. 일상생활에서의 5초는 눈 한번 깜박일 만큼 짧은 시간이지만, 필라테스에서의 시간은 다르다. 느리고 무겁고, 천근만근, 지구 위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중압감을 느끼는 무서운 순간이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 추가되는 5초라 매번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다. 운동을 계속하다가는 ‘몸짱’이 되기보다는 이대로 ‘운동’에 치여서 죽을 것 같은데도 선생님은 잔인하게 ‘5초만’, ‘10초만’ 더 버텨보라고 요구한다. ‘마의 5초’의 시간, 힘든 운동 끝에 추가되는 이 활동을 필라테스에서는 근육이 새롭게 생성되는 마법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수업 때마다 상냥한 선생님은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지만 체지방이 불타고 근육의 인내심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 사람은 힘겨운 운동 끝자락에 추가된 시간 앞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5초, 10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떠올리는 생각은 양자택일의 힘겨운 고민이다. 그 순간만큼은 앞에서 호령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일찌감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없는 차가운 사막 위에 떨어진 여행자처럼, 망망대해 속에 홀로 나온 어부처럼, 혼자만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만일 내가 여기서 동작을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선택지이다. 흥미롭게도, 머릿속에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부터는 바로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동작이 뭉개지고, 그동안 억지로 버텼던 모든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속에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혹은 ‘나 이제 힘들어’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든 순간에는 5초의 시간이 이미 의미가 없다. 운동하는 동안 무시했던 모든 지구의 중력이 팔로, 다리로, 배로 쏟아지기 시작하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동안 힘들게 고생했던 모든 노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5초를 버티는 보기 드문 순간이 있다. ‘포기’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보다는 ‘어떻게든 이 시간을 견디겠다’라는 비장한 마음을 먹는 시간이 있다. 그럴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선생님이 일부러 천천히 말하는 듯한 5초의 시간을 죽을 둥 살 둥 버텨낸다. 그러면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환희가 밀려온다. 힘든 고난의 5초를 견뎌준 근육에 대한 고마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등등, 평소 느껴보지 못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쏟아진다. 그 시간을 버티고 바로 설 때는 온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인다.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그 5초 동안 깨달은 사람처럼 말이다.


 힘겨운 올해의 여정 중 마지막 12월은 필라테스 동작에서 추가된 마지막 5초와 같은 시간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1월, 신학기로 정신없었던 3월, 무더위로 지쳤던 8월이 지나면 오로지 반복된 일련의 활동으로 지쳐버린 마지막 12월이 된다. 대부분 사람이 그동안의 결심을 모두 잊어버린 채 ‘병약한 패잔병’처럼 이달이 어서 지나가길 바란다. 그러면서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을 12월에 몰아 만나며 허한 마음을 억지로 달래 보지만 쉽지 않다. 진정한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한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은 스스로의 마음에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초에 정했던 목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묻는다. 가까이에 있는 ‘게으른 편안함’만을 즐기며 바쁜 일정을 핑계로 무시하지 않았는지 살펴본다. 스스로가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만 급급하여 하고자 했던 목표는 ‘나중’을 다짐하지 않았는지 되묻는다.


 12월에는 그동안 무시해 왔던 ‘나의 소망’을 투명하게 응시해야 다. 그동안 반복했던 일에 대한 피로가 쌓이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느끼는 ‘마의 5초’와 같은 시간이다. 매년 이달에는 5초 동안 필라테스에서 느꼈던 숨 가쁜 기억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제 포기할래?’ 아니면 ‘끝까지 버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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