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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an 10. 2023

허공에 성을 지어도 그 노고는 헛수고가 아니다

 몇 년 전에 마흔의 문턱을 넘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가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전까지는 경력이 단절된 여느 여성들처럼 집에서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다. 먼 지방에 계신 부모님들께 아이들을 맡길 형편도 아니었고 기대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아이들이 내 손이 필요하지 않을 날만 고대하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마흔의 나이, 하고 싶은 일들, 찾고 싶은 꿈들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날이었다.


 공자는 논어의 <위정 편>에서 마흔의 나이를 ‘불혹’이라 불렀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공자가 살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다른 탓인지, 마흔을 갓 넘긴 난 오히려 세상의 수많은 기회와 일들에 마음을 뺏겼다. 오히려 공자의 말보다는 정여울 작가의 <마흔에 관하여>에 나온 구절이 그 당시의 나를 잘 풀이하는 표현이었다.


 “다음에 여유가 되면 해보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정말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이자, 더 늦으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시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함께 느껴지는 나이다.” <마흔에 관하여/ 정여울>


 마흔. 그 시절의 난 이미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늦었다는 생각에 무척 조급했고, 배우고 일할 수 있는 공간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무척 바지런히 움직였던 시기이기도 했다. 줄곧 매달려 오던 일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일정을 만들었다. 그러다 바쁜 일정으로 너무 버거울 때는 ‘게으른 휴식’을 찾으며 툴툴거렸지만, 혼자 즐기는 ‘온전한 심심함’을 못 견뎌했다. 몇 년 동안 지체된 시간을 메우기 위해 바삐 움직였고,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를 부러워하며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렇게 대부분 40대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곧 1년 후면 맞이할 지천명의 나이, 이제야 나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을 알’기 보다는 더 혼란에 빠져버렸다.


 지금까지는 내 마음의 고요한 자취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성공방식의 뒷자락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사회에서 인정되는 화려하고 빛나는 삶의 방식이 최고라고만 생각했고, 그 외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연결 사회에서 홀로 달리 생각하는 일은 불안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의 방식과 비슷하게 맞추었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SNS 세계에서 나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의 글을 읽으며 ‘좋아요’를 눌렀다. 내 글을 읽고 어쩌다 받게 되는 공감의 표시는 꼭 하루치의 반짝이는 기쁨을 선물했다. 이렇게 연결된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반응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남들의 반응과 객관적인 평가에 집착할수록 자꾸만 하고 싶은 방향을 잃어버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었을까?


 일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에서 한 작가의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종종 사소하고 추레해 보이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조용하고 은밀한 계시의 섬광’처럼 ‘종종 멘토나 동료의 인정도, 팡파르도 없이 그냥’ 온다고 말이다. 나에게도 이런 깨달음의 순간은 세상의 온갖 잡음이 흩어지고 슬며시 잠이 들려는 순간에 갑자기 찾아왔다. 그동안 마음속에 잠겨 있는 ‘내 목소리’가 지천명의 나이에 가까워지는 나이에 조금씩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니?”라고 말이다.


 야심만만했던 젊은 시절에는 남의 평가와 인정을 받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어떻게든 성공한 사람의 옷자락을 부여잡고서라도 뛰어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내 이름 석 자’를 베스트셀러 책 표지에 콕 박아두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솔직히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않는다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천명의 나이가 가까워서야 허무맹랑한 소리로 여겨졌던 소로우의 <월든>의 구절들이 마음에 콕 박히기 시작한다.


 ‘허공에 성을 지었다 해도 그대의 노고를 헛수고로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신의 성이 있어야 할 곳은 딱 거기가 되도록 하면 된다. 이제 그 밑에 기초를 넣으면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사람들의 삶의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삶이 실패작이고, 또 어떤 삶은 성공작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사람의 선택과 꿈은 오로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재수, 삼수를 하든, 혹은 중간에 포기하든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유능한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뱀의 머리’가 되든, ‘용의 꼬리’가 되든, 그 선택이 행복을 선물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살을 먹고 지천명의 나이가 가까워져서야 ‘나’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외부에서의 소란스러운 자극보다 내 마음의 잔잔한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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