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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Jul 20. 2023

나만의 글쓰기 동기를 찾다

 살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가치가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모두에게 주어진 객관적인 하루는 24시간의 숫자 속에 갇혀 있다. 그 시간을 좀 더 빨리 시작하는 사람, 좀 더 늦게 시작하는 사람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똑같은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본인들의 삶과 생각들을 찍고 쓰고 홍보하며 조금이라도 ‘내 삶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모두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시대이다.


 얼마 전 한 기사에서 어떤 유명인이 요리를 하는 데 기껏 남편이 그 영상을 깜박하고 안 찍어서 화가 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답답한 속내를 비치며 결국 다시 요리를 하며 영상을 찍었다고 했다. 분명 그녀의 유튜브 채널의 처음 시작은 일상 공유에서 시작되었지만, 의도를 가지고 생활하는 순간, 그녀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거울 속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낯선 이들의 일을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본인과 관련이 없는 이상, 사람들의 일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자신이 주축이 되어 타인의 삶이 돌아갈 때 비로소 관심은 비춘다. '흥미', '관심'이 결여된 타인의 삶, 생각을 엿보는 것은 고역이다. 그런 영향인지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은 에세이류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에세이스트가 쓴 글도, 유명작가가 쓴 에세이도 지루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관심이 있는 작가들의 글쓰기의 고민이 담긴 글을 쉽게 읽힌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나마 즐거웠던 이유는 책 속에 담긴 희망 때문이다. 그토록 위대해 보였던 하루키가, 김영하가 글을 쓰면 고민했던 흔적들을 따라 읽으면 ‘그들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어쩌면 그런 '귀에 착착 감기는 달콤한 말', ‘공감이 가는 말들’ 가득한 에세이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판매 전략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얼마 전 현재의 삶이 더 이상 내세울 것 없이 아주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글쓰기 벽에 부딪쳤다. 지금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아득한 망각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 말이다. 이미 수많은 재야의 작가들이 글쓰기에 몰두하고 AI마저 인간 고유의 분야라는 창작에 뛰어든 시점이다. 그런 글쓰기 ‘춘추전국 시대’에 매일 내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고 서평을 기록하는 행동이 이 세상 인간들의 자료를 모으려고 혈안이 된 인공지능에게 좋은 먹잇감을 쥐어주는 것은 아닐지 상상도 해봤다. 그 순간 글쓰기가 두려워졌다.


 지금까지 그때그때의 감정과 생각에 취해, 혹은 세상사를 향한 기분에 취해 글을 휘갈겼다. 모두 나만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글 쓰는 필드에서 글을 올리는 이상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누군가의 따가운 비평을 받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 서늘한 무관심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순간 ‘남들의 관심’에 허덕이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그동안 간직했던 솔직함이 사라졌다.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유튜브를 시작했던 유명인이 어느 순간 ‘보이기식 일상’을 공유한 것처럼, 나 역시도 흥미로운 글쓰기 소재를 찾아 헤매었다.


  소설 창작이나 글을 쓰는 수업을 들으면 항상 듣는 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이다. 나의 이야기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든, 어느 한 꼭지, 마음 깊은 속에서 숨어 있는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을 때 아주 멋진 창작물이 탄생한다. 수많은 작가들은 여러 가지 경험과 놀라운 상상력, 자료검색 그리고 고민들 속에서 본인만의 멋진 작품을 완성시킨다. 소설 속 많은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펼쳐놓은 다양한 배경 속에서 울고 웃으며 또 하나의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 간다. 진짜 인간 세상에서는 숨기고 싶은 숱한 인간들의 욕망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유령이 등장하고 살인이 일어난다. 갑자기 시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죽은 이를 볼 수 있다.


 그런 ‘특별함’만이 글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신기한 소설이다. 그가 창조한 인물, 스토너는 소설의 첫머리에서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만큼 평범한 사람이다. “스토너의 동료들”조차도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존 윌리엄스가 창조한 스토너는 그야말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수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본인만의 ‘특별한 책’으로 손꼽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스토너가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한다. 교수가 되고 불운한 결혼생활 중 운명처럼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불륜의 장면조차도 스토너의 성격에 맞게 현실과 타협시키며 평범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지루하게 이어지는 스토너의 평범한 삶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빛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지 않았을까 싶다.


 병으로 죽기 전 스토너는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한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우연히 만난 단 하나의 사랑도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느라  떠나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그의 질문에 전율을 느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던지는 그 한 마디, 그 질문들이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어쩌면 평범한 사건이 될 수 있었던 이 장면이 스토너의 고백과 질문으로 그 일은 특별한 울림이 되었고 독자들의 마음에 콕 박혔다.


 조지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 쓰는 동기를 첫째가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순전한 이기심‘이요, 둘째가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열정‘이라고 꼽았다. 그리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인 '역사적 충동'이요,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중에서 그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최고라고 꼽았지만, 난 '순전한 이기심‘이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첫째 원동력이요, 내 기록을 남기고 싶은 ’역사적 충동‘이 두 번째라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자꾸만 잠긴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특별한 의미를 찾으며 글쓰기가 버겁다. 그럴 때면 조지오웰처럼 '나는 왜 쓰는 가?'의 질문을 되새긴다. 그와 같은 유명한 작가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항상 반복되고 지속되는 글쓰기 불안 속에서 부적처럼 붙들고 물어본다. "왜 쓰는 가?" 수많은 열등감의 현실괴 타협하고 싶을 때면 떠오르는 질문이다.

  

 생각해 보면 매번 지금의 시간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특별해야지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지금의 시간을 쓰고 기록하고 남겼던 이유는 그래야지만 특별한 기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가끔은 그 길이 두렵고 힘겹고 외로운 길이 될지라도 말이다. 지금의 기록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망각 속으로 던져 버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이 어제와 달랐고 또 내일과도 다를 거라는 근거를 적어두는 거지.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되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삭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좋아한다>(데어라 혼/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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