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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Sep 13. 2023

특별한 글의 맛

 어떤 글을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독특한 향과 맛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장르가 문학이든, 수필이든, 칼럼이든 그 종류는 상관없다. 작가의 유명세 역시 중요하지 않다. 한 문장, 한 구절,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글쓴이가 끌고 가려는 글 세상의 향과 감각이 느껴질 때 온몸에서 전율이 흐른다. 신기하게도 이런 경험은 유명한 작가의 글에서보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 종종 느낀다.


 첫 번째 경험은 H 문화센터의 소설가가 진행하는 창작교실에서였다. 그 당시 매주 한 가지 주제로 2페이지가량의 스토리를 써는 숙제가 있었다. 소설가 선생님은 신문에 나오는 한 꼭지의 사건이나 한 단락의 특별한 스토리를 소설의 주제로 제시했고, 15여 명 남짓의 수강생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본인만의 창작물을 완성해야 했다. 창작 수업에 참가한 그들의 이력 역시 남달랐다. 미술계의 음모와 연인들의 치정에 관심이 많은 젊은 대학생들도 있었고, 성형 관련 세일즈를 하는 회사원, 동화를 쓰는 주부, 그리고 이미 메이저 신문에 ‘시’ 작품으로 등단했지만 처음으로 소설을 쓴다는 기성 시인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인인 그녀가 쓰는 짧은 꼭지의 글에는 항상 신기한 감각들이 넘쳐흘렀다. 무서운 소재로 글을 읽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묘사와 단어의 조합으로 온몸의 솜털이 삐쭉 솟았고, 노총각 회사원 소재의 측은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주인공의 ‘푹 고은 오징어 대머리’에 흘러넘치는 땀들을 닦아 주고 싶었다. 분명히 그 수강생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다른 수강생들의 세련되고 찰진 스토리 구성에 비해 촘촘하지도 않고 재미가 덜했지만, 글 속에 묘사된 단어, 문장들은 파닥파닥 뛰어다녔다. ‘스토리 라인은 재미없는데, 문장이 너무 매력 있다.’ 그녀의 글을 읽고 난 첫 느낌이었다. 그 수강생의 소설들을 계속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어두운 감정으로 자꾸만 움츠려 들었다.


 두 번째 경험은 수필가 밤호수님이 진행하는 에세이 수업에서였다. 그 창작 교실에서 소설 쓰기에 대한 용기가 한 풀 꺾인 후 또 하나의 도피처가 필요했다. 사실, ‘누구나 쓴다는 에세이라면 쉽게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생각이 강했다. 재미있게도 이 클럽에서도 매주 1편씩 각각의 주제로 글을 써야 했다. 그런데, 뜻하지 못한 복병은 나의 ‘꽉’ 막힌 성향이었다. 솔직히 ‘나’에 대해 글을 쓰거나 다른 사람들의 개인사를 적은 글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객관적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소재나 주제는 좋아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글만은 유독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나’에 대해 쓰는 글은 오직 몰래 숨겨놓고 적는 ‘일기’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수업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내 이야기를 쓰는 일들도 무척 어려웠다. 특출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수업 초반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한 글을 읽고서 잠시 글쓴이의 시간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했다. 그 에세이 속에 있는 문장과 이야기를 읽다 보니, 코끝에서 자꾸만 달큰한 간장 냄새가 풍겼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씩을 읽다 보면 황톳빛 마룻바닥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하얀색 간장종지를 두고 앳된 며늘아기와 자애로운 시어머니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들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따뜻한 시간의 향기였다. 그 글 속에 나온 표현들은 분명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접한 표현이자 단어들인데, 유독 그 글 속에서만 잘 달인 간장향이 났을까? 글을 읽고 난 이후에도 눈이 시리도록 하얀 간장종지의 잔상은 자꾸만 그녀의 추억 속으로 자박자박 끌고 갔다.


 가끔은 이토록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숨은 고수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다. 자꾸만 이렇게 몇몇 이의 글 솜씨에 쉽게 홀리는 나 자신도 참 얄밉다. 아무리 베스트셀러 작가, 세계적인 문호라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글들을 읽으면 과감히 책을 덮어버리는 ‘도도한 감성’의 나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글에서 접한 언어의 특별한 맛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이런 매력은 화려한 출판사의 상술로도, 작가의 유명세로 빚기가 어렵다. 오직 수많은 노력과 시간, 글에 대한 애정과 진한 감정만이 홀리는 특별한 맛을 우려낸다. 그들의 글 솜씨는 항상 질투 나지만, 그래도 그런 글들이라면 계속 맛보고 싶다. 매번 시기심으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너덜너덜 쪼그라들지라도 말이다.


 얼마 전에 무료 앱의 AI에게 몇 가지 소재를 주고 글쓰기를 시켰다. ‘어라, 요 녀석도 글을 잘 쓰네?’ 생각지도 못한 글의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모습이 제법이다. 아직은 세세한 묘사와 표현은 서툴지만, 다양한 정보로 ‘기-승-전-결’로 이끌어가는 구성력은 나보다 낫다. 이제는 창작물을 쓰기가 버겁다고 느낀다. 요즘 떠오르는 신예들의 참신한 감각을 따라가기도 힘들고, 문학계에 잔뼈 굵은 작가의 노련미를 따라가기에도 부족하다. 이런, 이제는 그토록 많은 ‘쓰는 사람’도 모자라서 AI와도 경쟁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 AI들이 글을 쓰는 세상에서 더 이상 글 쓰는 행위는 ‘특별한 작가’, ‘천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글만 쓰기만 하면 유명해질 거야’라는 낡은 소망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구나 글을 쓰는 세상, 글쓰기도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처럼, 이제는 ‘나’라는 인물을 정의하기 위해 계속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매시간 쌓이는 수많은 세상의 기록물 속에서 오직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도 특별한 글의 맛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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