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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Oct 14. 2023

당신은 누구와 비교하고 있나요?

 사람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살아간다. 돈, 사회배경, 재력, 멋진 집, 학벌, 뛰어난 외모 등 세상에는 본인과 비교할 수 있는 많은 것이 있다. 특히 SNS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아침에 깨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혹은 1년 365일, 바지런히 비교대상을 찾아다니며 본인을 고통스러운 열등감의 시험 속에 빠뜨린다. 오죽하면 한때 ‘카페인 우울증’이란 말이 유행했을까?


 ‘카페인 우울증’은 커피와 같은 과도한 카페인 섭취로 생기는 부작용이 아니라 ‘카카오 스토리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이다. 다른 사람이 올린 SNS(소셜 미디어)에 올린 인증 샷이나 활동을 보고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우울을 느끼는 증상이다. 지금 이 순간 SNS 누군가의 인증 샷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기분이 가라앉는다면 생각해 보길, 지금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말이다.


 어떤 이는 남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남과의 비교는 때대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멍에’처럼 느껴진다.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면 살고 있다. 초보엄마들이 첫아이를 임신하면 제일 먼저 구입하는 도서가 바로 임신 관련 육아 책들이다. 그 책에는 보통 임신 주기부터 임산부가 지켜야 할 규칙, 주의해야 할 음식들, 아이들의 정상 발육 속도와 몸무게까지 다양한 정보들이 들어있다.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끊임없이 사회가 정해놓은 책 속의 평균치와 비교당하고 있다.


 태어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쟁의 시작이다. 뒤집기, 걸음마, 몸무게, 한글 떼는 속도까지 세상에는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와의 성적에, 좋은 학벌, 직장에 가면 어떤 직장에 다니는 지도 비교 대상이다. 혹 결혼을 하면 어떤 집에 사는지, 혹은 부모에게 용돈을 얼마나 주는 지도 비교 군에 들어갈 수 있다. 왜 이렇게까지 남들과 비교에 연연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유행처럼, 우리 사회 속에 ‘비교 바이러스’가 퍼져있다.


 많은 사람은 남과의 비교에 쉽게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 비교하며 상처를 주는 이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비교는 거의 본능처럼, 무의식처럼 이루어지는 탓이다. 비교하는 이도 지금까지 받아온 평가기준을 그대로 또 다른 사람에게 써먹는다. 보통 ‘잘한다’, ‘좋다’, 혹은 ‘괜찮다’라는 비교의 말을 쓸 때는 본인이 상대방보다 조금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부모는 본인의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엄마가 “우리 아이는 다른 집 A친구보다 공부를 못해 속상하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비교는 그나마 부모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있는 애교 수준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사회통념 상 용납되기 어렵다. 만약 아이가 “우리 아빠는 다른 A 아빠보다 돈을 못 벌어 속상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소지가 있다.


 때로는 서로의 관계가 평등한 경우에도 비교가 일어날 수 있다. 숭례문학당 비경쟁독서토론 강사과정을 밟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말이 절대로 ‘좋다’, ‘잘했다’ 등과 같은 말을 쓰지 말라는 거다. 문학당의 독서토론 ‘기본부터 리더, 심화, 고급’ 과정을 연달아 들으면서 가장 힘겨웠던 부분은 주어진 벽돌 책을 읽고 선택논제 만들기가 아니었다. 바로 독서토론 실습과정에서의 사용하는 나의 화법 고치기였다.


 솔직히 이 과정을 듣기 전에는 내 말투에 ‘좋다’, ‘잘했다’라는 문장이 많이 배어 있는 줄 몰랐다. 어쩌면 평소 선생의 입장에서 학생들과 많이 교류한 탓일 수 있다. 처음 강사로부터 이런 지적을 받았을 때는 속상한 마음도 있었다. ‘참가자들의 의견과 낭독에 칭찬하고 격려하면 더 좋은 것 아니야? 너무 세세한 것까지 지적하네.’라는 불만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토론 참여자로서 참여해 보니 누군가를 칭찬한다는 것은 마음의 균열을 만드는 것이요,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평가하는 행위였다.


 요즘 매일 브런치에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경수필’과 같은 에세이를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라며 무시했었다. 에세이는 신문 칼럼처럼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하지도 않고, 소설처럼 탄탄한 구성과 문체, 기발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글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의 흐름대로 끼적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매일 100일 글쓰기 목표를 세우고 브런치에 글을 썼지만, 에세이에 대한 평소 생각이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이제 거의 한 달이 지난 요즘, 놀랍게도 에세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솔직히 예전에는 남들의 에세이를 읽을 때 문체와 구성, 기발한 아이디어, 지식들을 중점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너무 본인의 인생사가 솔직하게 드러난 에세이는 좋아하지 않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요즘 에세이를 읽으면 그들이 힘겹게 걸어온 삶이 보인다. 그래서 그렇게 힘든 일을 잘 견뎌온 그들에게 박수를 쳐 주고 있다. 너무도 잘했다고, 존경스럽다고 응원하면서 말이다.


 에세이 쓰기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에게 이토록 몰입할 수 있는 글쓰기가 또 있을까? 에세이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조금 부족한 문장력도, 글의 구성도, 그들만의 솔직한 인생이 느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진실의 글쓰기 앞에서는 글의 기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서 나에 대한 글쓰기가 가장 어려운 나였다. 그래서 소설 쓰기나 작문을 할 때마다 나에 대한 글쓰기 숙제가 있으면 짜증부터 났다. 다른 이에게는 가장 쉽다고 하는 주제가 나는 가장 어려웠다. 특별한 경험이 없어서, 할 얘기가 없다는 핑계로 대충 써서 내곤 했다. 어쩌면 누구보다 뛰어난 글을 쓰고 싶은 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항상 누군가의 좋은 점과 내가 가진 것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감옥 속으로 가두었다. 남의 사소한 의견을 예민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누구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상처 입힌 사람이 바로 나였다.


 오늘 하루, 에세이로 마무리하며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얼마나 나에게 집중했나? 글을 쓰며 조금씩 나를 드러내는 연습을 배우고 있다. 어제의 나보다도 오늘의 나, 오늘의 나보다는 내일의 내가 좀 더 충실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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