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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9. 2021

하늘 진주의 독서 유람기ㅡ<제5도살장>

2021년 읽었던 책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

2021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오면 인터넷 서점들에서는 ‘올해의 책’을 뽑는 행사를 한다. 그동안 출판했던 책들을 살펴보고 독자들의 취향을 헤아리는 것이 책 투표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 올해 읽었던 책 목록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책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항상 읽었던 책의 소감들을 종이 노트 속에만, 기억 속에만 남겨두곤 했는데 이렇게 내 기억을 더듬어 책들을 다시 여행해 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2021년 읽었던 책들 중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책 1위는 <제5 도살장(커트 보니컷, 문학동네)>이다. 얼마 전에도 재독을 했지만 여전히 이해 하기가 힘들었다. 문해력이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만은 다시 곱씹어 읽어도 너무 어렵다. 솔직히 <제5 도살장>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지 의문이다. 이 소설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책 속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의 언어인 “뭐 그런 거지(So it goes)”로 표현하고 싶다.


<제 5도살장>을 쓴 커니 보니컷은 1922년 독일계 미국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쓴 것으로 보이는데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은 작가의 경험과 너무 일치한다. 그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나갔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드레스덴의 도살장을 개조한 수용소 ‘제5 도살장’에 끌려갔다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루어진 연합군의 공습을 경험했다.


작가가 경험한 '드레스덴 폭격'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있었던 1945년 ‘도쿄 대공습’을 기억할 뿐 독일의 평화로운 도시에서 발생한 비극은 잘 알지 못한다.  지금도 드레스덴의 하이드 프리도프 공동묘지에는 공습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고 한다. 그 비석에는

“얼마나 죽었던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여기 이름 없는 너의 상처에서 가혹한 시련을 본다. 인간이 만든 불지옥에서 타버린 당신이 겪어야 했던.”

라는 문구로 드레스덴 비극을 기록하고 있다.


1945년 2월 13일에 이루어진 미·영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은 도시의 90%를 파괴하고 대부분이 민간인이던 2만 5000명에서 최대 13만 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에 그 피해는 더 엄청났다고 한다.


  <제5 도살장>은 제2차 대전에 발생한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하면서 액자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나’라는 일인칭 화자가,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빌리 필그림’이 각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화자인 ’나‘는 전쟁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드레스덴에 관한 책을 쓰고 싶은 열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열망에 비해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린다. 책을 다 쓴 이후에도

래 대학살 뒤에는 모든 것이 아주 고요해야 하고 오직 새만이 비극 앞에서 ‘지 지배 배뱃’라고 말할 수 있다(p33)'고 말하며 책 집필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부터 등장하는 그의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특이한 인물로 설정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하고 미국으로 돌아오지만 몇십 년 뒤, 딸의 결혼식 날 트랄파마도어인의 비행접시에 납치된다. 이후 주인공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반복해서 오가며 시간 여행을 하는 인물이다.


빌리는 시간여행 속에서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목격하며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다. 그의 시선과 심리에 따라 소설의 배경은 여러 번 바뀐다. 주인공의 20대로 가기도 하고 갑자기 노년 시절의 빌리를 만나기도 한다. 조금 적응이 될 만하면 갑자기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주인공을 발견하기도 한다. 빌리의 뒤죽박죽 한 시간여행은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 늘 존재할 것이다. 트랄파마도어인은 예를 들어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듯이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고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떤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p43)'


이런 가정 속에서 <제5 도살장>의 빌리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마음껏 오간다. 다른 소설의 시간 여행자처럼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가 혹은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염려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겪어왔던 중요한 역사 순간들을 오가며 '관찰자'마냥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런 빌리의 시선 때문인지 이 소설이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반전 문학이라 불리고 있지만 전쟁의 참혹함, 비극성을 강조하기보다는 ’트랄파마도어인‘의 초월적인 시선이 더 강하다. 소설 속에서는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갈 때마다 ’트랄파마도어인‘처럼 ’뭐 그런 거지‘라는 덧붙여진다.


  하지만  <제5 도살장>도 분명히 전쟁의 참혹함을 많이 담고 있다.


바깥에는 불이 폭풍처럼 번지고 있었다. 드레스덴은 하나의 거대한 화염이었다. 이 하나의 화염이 유기적인 모든 것,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 (중략)

해는 약이 바짝 오른 작은 핀 대가리였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표면 같았다. 광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은 뜨거웠다. 그 동네의 다른 모든 사람이 죽었다.

뭐 그런 거지.(p221-222) ‘


특히 연합군의 폭격이 있은 후 드레스덴을 황량한 ‘달 표면’과 같다고 표현하며 그 끔찍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작가는 그 장면의 감정을 그대로 끌고 가기보다는 ‘뭐 그런 거지’라는 관조적인 시선으로 감정을 매듭지어 버리고 곧바로 다른 장면으로 시간 이동해 버린다. 이 부분이 <제5 도살장>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이 소설은 인물들의 감정 선과 사건들을 그대로 이어가지 않고 SF 요소와 의식의 흐름으로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슬픈 장면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분노할만한 장면에서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 속의 사건들을 어지럽게 오가며 경험할 뿐이다.


만약 이 소설의 주인공이 ‘빌리’가 아니라 드레스덴 폭격 이후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고등학교 교사 ’에드거 더비‘이었다면, 좀 더 인물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전쟁의 비극이 잘 부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해 시간 여행을 하는 ’빌리‘를 굳이 주인공으로 삼으며 궁금증만 유발한다.  

왜 작가는 시간여행자 ’빌리‘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어쩌면 작중 화자 ’나‘가 시간 여행을 하는 ’빌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진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과 비극을 묻어 두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 탓이 아닐까 싶다.


 첫 부분의 화자인 ’나‘는 첫 문장에서 이 소설은 실화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어쨌든.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이 드레스덴에서 자기 것이 아닌 찻주전자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정말로 총살을 당했다.(p13)'


‘나’는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소금 기둥인 된 ‘롯의 부인’ 일화를 언급하며 이 소설은 실패작이자 소금 기둥이 썼다(p36)고 밝힌다. 그리고 ‘빌리와 트랄파마도어인의 대화’ 속에서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해라.(p151)'는 마음을 드러냈다. 실화이면서 비극이었던 드레스덴의 비극에 대해 '소금 기둥‘이었던 작가는 쓸 것인지 말 것인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빌리‘가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닌 지 추측해 본다.


작가 ’커트 보니것‘은 실제로 드레스덴의 비극을 겪었고 소설 <제5 도살장>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커니 보니컷’과 일인칭 화자인 ‘나’와 ‘빌리 필그림’을 동일선상에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인칭 화자인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대학살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적의 대학살 소식을 듣고 만족하거나 기뻐해서는 안 된다(p34)'고 당부한 것에 비해 ’빌리 필그림‘의 아들 ’로버트는 훈장을 단 군인이 되었다.(p235)'는 부분에서는 좀 차이가 느껴진다.


확실히 <제5 도살장>은 2021년에 읽었던 책 중 가장 어려웠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 보지 못한 탓인지 책을 읽는 내내 혼돈스러웠고 읽고 난 후에도 정리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숨겨진 비극 ’드레스덴의 폭격‘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커트 보니것‘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접하는 내내 머리는 좀 아프겠지만 그래도 빌리의 시간 여행을 따라가는 재미는 쏠쏠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뭐 그런 거지‘라고 인생만사를 다 초월한 트랄파마도어인의 인생관을 접해도 성공이지 않을까? 도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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