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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22. 2021

원초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

마거릿 와일드의 <여우>

원초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 마거릿 와일드의 <여우>




 마거릿 와일드의 <여우> 그림책은 IBBY 국제 아동도서 협의회 최우수상, 독일 최고 어린이 문학상, 퀸들랜드 최우수 어린이책 문학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강렬한 붉은색과 검은색, 거칠고 날카로운 펜으로 새겨진 책 표지를 보며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을 살피게 된다. 맨 겉면에 그려진 여우와 까치의 관계는 미묘해 보인다. 검은 까치는 붉은여우를 하염없이 바라보지만 여우는 제 곁의 까치 따위는 안중에 없어 보인다. 그는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라는 유혹의 시선으로 오직 책 프레임 밖의 누군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큰 불로 새카맣게 타 버린 숲에서 개는 날개를 다친 까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동굴로 데려온다. 하지만 날개를 잃은 까치는 절망감에 개의 보살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개는

그런 까치에게 조금씩 다가서고 마침내 둘은 서로의 눈과 날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앞에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난다. 착한 개는 쉽게 여우를 받아들이지만 까치는 여우를 불길하게 여기며 경계한다. 개가 없을 때 여우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알려 주겠다며 까치를 유혹한다. 까치는 처음에는 여우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전처럼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자신의 날개였던 개를 버려둔 채 여우를 따라나선다.

   

 “날아라, 날아! 내가 너의 눈이 되어 줄게. 너는 나의 날개가 되어 줘”

 날개를 다쳐 날 수 없는 까치는 힘차게 달리는 개의 등 위에서 이렇게 외친다. 개와 까치는 그렇게 서로를 의지한 채 매일 이곳저곳을 열심히 달린다. 서로의 날개가 된다는 것, 서로의 눈이 된다는 것만큼 깊은 우정이 또 있을까? 개와 까치는 누구도 갈라놓은 수 없을 만큼 두터운 우정을 쌓아간다. 하지만 둘 사이는 이들 사이를 질투한 여우에 의해 깨지고 만다.

 “하늘을 나는 게 어떤 건지 기억해? 진짜로 나는 것 말이야!”

 날 수 없는 까치에게 건네는 여우의 속삼임은 너무도 달콤하다. 그 말을 들은 까치는 조금씩 흔들린다. 진짜로 난다는 것, 날개를 잃은 까치에게 진짜 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개와 까치의 관계는 까치의 본질적인 욕망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그런 까치의 선택이 모질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가끔은 주변의 관계보다는 자신의 근본적인 정체성, 끊어낼 수 없는 태초의 소망을 따라 자신을 맡겨 버릴 때가 있다. 날개를 잃은 까치는 날게 해 주겠다는 여우의 유혹을 들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다. 마치 에덴의 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한 뱀의 입김처럼 달콤하고 새로운 길을 안내해 준 모세의 지팡이처럼 희망찬 미래를 말이다.


 밝고 명쾌한 결말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책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작품은 특히 화면 곳곳에 새겨진 투박하고 날카로운 펜 느낌과 강렬한 원색 배열로 불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책에서 특이한 점은 불친절하게 뒤죽박죽 배치된 활자의 행렬이다. 작가는 독자들의 편안한 가독성을 포기한 양 문장들을 가로 세로로 복잡하게 배열시켰다. 책의 글자들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은 개의 초점 인양, 혹은 날지 못하는 까치의 시선 인양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놓여 있다. 어쩌면 작가는 무질서한 활자의 배열로 까치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내심이 길지 않은 어린 독자들이 이 책을 읽기에 불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생을 막 알아가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청소년에게 권할만하다. 복잡한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우정의 의미와 자기 정체성, 인생 곳곳에서 다가오는 유혹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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