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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Nov 14. 2023

진실의 목소리와 권력 사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원수인 가문에서 태어난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다운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희곡이다. 풋풋한 청춘 남녀의 달달한 사랑이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소설에서 리메이크되거나 인용되었다. 이 희곡에서 가장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은 로미오가 잘못된 정보를 받고 자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본 독자들은 ‘로미오가 조금만 늦게 독약을 마셨더라면’, 혹은 ‘줄리엣의 가짜 죽음을 알리는 로렌스 수사의 편지가 제대로 로미오에게 전달되었더라면 어땠을까?’라며 안타까워한다. 로렌스 수사의 편지는 로미오가 추방당한 도시에 전염병이 퍼져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 진실을 알리는 소중한 정보가 다른 위압적인 상황으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진실은 어떤 순간에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얼마 전에 KBS 주요 앵커들이 물갈이되었다. 이번에 취임한 신임 사장의 권한으로 KBS가 '뉴스 9'를 4년 동안 진행해 온 이소정 앵커와 제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진행자 주진우 씨를 하차시키고, 주요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들을 모두 교체시킨 것이다. 이러한 인사 배경으로 KBS 측은 "주요 종합뉴스의 앵커를 교체함으로써 KBS의 위상을 되찾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언론노조 KBS 본부 측은 이번 인사가 “노사 단체협약과 편성 규약에 따라 사측이 개편을 실무자와 협의해야 하고 긴급 편성 때는 교섭대표 노조에 통보해야 하는데 이 같은 절차를 지키지 않았”(출처: 2023.11.13. 연합뉴스, 황재하 기자)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KBS 내에서도 적잖은 논란의 불씨들이 들끓고 있는 모양이다.


 흥미로운 점은 KBS의 인사 배경이다. 앵커를 교체한 주최 측은 그동안 기존의 뉴스 프로그램 진행자들과 시사 프로그램 앵커들이 “KBS의 위상을”을 훼손시키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저버렸다”라고 인사 교체 이유를 밝혔다. KBS의 다른 시사 프로그램은 잘 모르지만, KBS 저녁 9시 뉴스만은 꼭꼭 챙겨보는 편이었다. 다른 방송국의 뉴스 진행자들과 다르게 혼자 진행하는 이소정 앵커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전달력이 좋았고, 어떤 경우에도 흐트러짐 없이 진행하는 유연성이 너무 멋있었다. 그런 앵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껏 한 번도 KBS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다른 방송국에 비해 허접한 품위를 지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애청자인 나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건만, 난데없이 혹독한 자기비판이라니. KBS는 얼마나 높은 인사 채용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럼, 이번에 발탁한 인사들은 정말로 ‘품위 있고’, ‘완벽하게 정확한 뉴스’만을 전달하는 아주 ‘완벽한 인재’들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두 눈을 매섭게 뜨고 예전의 진행자들이 했던 모습과 비교하면서 지금 바뀐 앵커들과 뉴스 내용을 지켜볼 것이다.


 예전에는 세상의 모든 언론인이 진실의 최전선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강한 정권’에 대항하는 ‘정의의 투사’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시민의 입장에서는 그저 정확한 진실을 밝혀주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독재정권에 맞선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통쾌했던 부분은 연희(김태리 분)가 트럭에 올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을 외치는 하이라이트 장면이 아니라 정부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며 ”마음껏 원하는 대로 해 봐‘라고, 시원스레 외치는 장면이었다. 그런 언론인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정의가 있다고 믿었다.


 요즘 언론인들의 위상은 예전과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부류의 기자들을 보면 ’기레기‘라는 말이 네티즌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허위 사실과 과장된 부풀린 기사로 기자로서의 전문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과 그 사회적 현상을 말한다. 간혹 이 말은 정치인들이 본인들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상대방을 향한 공격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은 자기의 뜻과 다른 기사들을 모두 ’가짜 뉴스‘라고 취급하고 ’기레기‘라고 폄하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번 KBS 주요 앵커들의 교체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 벌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왜 그분들은 세상의 모든 언론 기사가 가짜 뉴스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가장 걱정되는 점은 이런 감정적인 언론 탄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질서가 무너지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공 문제에 관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이다. 공공의 사안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상대방의 의견을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경청하는 자유, 틀린 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용하는 자유가 없다면 성숙한 민주주의를 절대로 이룰 수 없다. 언론의 자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풍성한 민주주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든 언론인을 물갈이한다면 이제부터는 무조건 듣기 좋은 ’태평가‘만 듣겠다는 심보일까?


 최소한 언론인은 로렌스 수사처럼 적어도 진실의 편지를 전하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권력자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일단은 전해야 한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누군가가 원하는 달콤한 소식만 전한다면, 진실만을 기다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로 인해 또 다른 비극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적어도 로렌스 수사는 비록 늦긴 했어도 진실을 알리려는 신념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진실을 전하는 여론의 목소리라면 최소한 대다수 국민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겠다. 적어도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여기는 국민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kbs앵커교체#여론#언론인의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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