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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진주 Aug 21. 2024

며느라기의 여성들

 추석, 설날과 같은 큰 명절을 시댁에서 보낼 때면 유독 머릿속을 아른거리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며느라기>다. 웹툰 원작의 이 드라마는 갓 결혼한 주부 ‘민사린’의 시선으로 대한민국 가정에서 가부장제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제목으로 쓰인 ‘며느라기’는 ‘며느리+아기’의 합성어인 ‘며늘아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 시댁의 사랑을 받기 위해 “뭐든 내가 할게요.”라며 자발적인 도우미가 되는 시기(時期)’이다. 이 기간은 짧으면 1년, 길면 평생이 되기도 한다.

 솔직히 드라마 <며느라기>를 볼 때면 시댁의 문화를 익히려 발을 동동거렸던 신혼 시절과 현재의 내 모습이 떠올라 마냥 편하지 않다. 결혼 전의 난, 가족들과의 명절을 잘 챙기는 ‘착한 딸’이기보다는 ‘개인 일정’을 먼저 생각하고 나만의 자유를 누렸던 철부지였다. 그런 사람이라도 일단 결혼하고 나면 예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당연히 시댁 식구들의 대소사와 명절 일정을 먼저 챙겨야 했고, 익숙하지 않은 '시댁 가풍과 며느리의 역할'을 헤아리며 조신하고 착한 며느리가 되는 과정들을 하나하나 밟아야 했다.


  결혼 전의 난 ‘동태전, 산적, 탕국, 여러 종류의 나물들’과 같은 명절 음식을 제대로 요리해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어머니는 딸들에게 집안일을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우리 딸만은 나 같은 인생을 살면 안 돼', '결혼하면 다 할 텐데 지금부터 할 필요 없어'라는 어머니들의 생각과 사려 깊은 모성애로 21세기의 딸들은 한시적으로 고리타분한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 역시도 친정어머니의 그런 배려로 결혼 전에는 집안 대소사의 일거리에서 한 걸음 빠져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부터는 그 옛날 며느리들이 짊어왔던 모든 일들이 갑자기 나에게 훅 던져졌고 당연한 의무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잘 모르는 철부지 여성이라도 결혼하고 나면 어설픈 솜씨나마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끼니를 챙겨야 했다. 혹시나 결혼 전처럼 본인을 먼저 챙기고 ‘개인 일’에만 몰두하면 ‘이기적인 주부’라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무슨 상황이든 결혼한 여성은 ‘가족’과 시댁 식구들을 먼저 챙겨야만 비로소 ‘착한 며느리’로 취급받았고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드라마 <며느라기> 속 주인공 민사린은 ‘시댁’이라는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현실 속 모든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착한 며느리’는 어떤 존재인가요?”

이 드라마의 사람들은 시부모에게 잘하는 며느리를 이른바 '착한 며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극 중에서 ‘착한 며느리 되기’를 포기한 첫째 며느리 정혜린의 일갈로 허울 좋은 이름 속에 숨어있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구일 씨는 피곤하니까 들어가서 자고,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술 드시고, 구영 씨와 미영 씨는 데이트하러 나가고, 차례 음식은 어머니 혼자 준비하시고… 다들 너무 했다. 그리고 저는 며느리니까 당연히 어머님이랑 같이 음식을 만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 맞죠?“


 '착하다'라는 말속에는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모든 명절 노동과 시댁 일정의 노동을 떠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 담겨 있다.


  철통 같은 가부장 중심 사회를 흔드는 특정한 책들은 몇몇 남성들에게 위험 분자로 찍힌 지 오래다. 오히려 이런 <며느라기> 드라마나 웹툰은 애교 섞인 푸념으로 받아 들여질 정도이다. 그중 2016년에 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대표적으로 남성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당시 20~30대 여성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하지만, ‘성차별을 역으로 조장한다’는 주장으로 ‘페미니즘 논쟁’을 확대되고 많은 비난에 휩싸였다. 이후 개봉된 영화 ‘82년생 김지영’ 역시 평점 테러가 이어졌고, 주인공 정유미도 역시 네티즌들의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사실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를 겪고 육아를 하며 일할 기회를 놓친 엄마들은 이 책과 드라마를 보고 난 후 깊은 공감과 함께 응원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저 성차별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남성주의 사회의 흐름 속에 정반대 시각을 던지는 이 이야기를 불쾌하게만 여겼다. <82년생 김지영>을 흥미롭게 읽었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을 결혼 후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여성이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군분투기로 보기보다는 ‘성차별’로 발전시켜 젠더 갈등으로 이어진 과거의 상황들이 지금 되새겨봐도 아쉽기만 하다. 우리는 결핍이 가득한 사회에서 자란 탓에 서로를 인정하기보다는 ‘덜 가지고 더 가지는 모든 것’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아닐까? 치열하게 싸워야만 비로소 ‘내 것’을 찾을 수 있는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말이다.


 2024년에 편찬된 이슬기 작가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보다 노골적으로 가부장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가부장 체제에서 성장한 주인공 ‘슬아’는 글쓰기로 모은 재력을 바탕으로 ‘가부장’도 아니요,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 시대를 표방한다. ‘가녀장’이라는 말은 작가 이슬아가 만든 용어로, 딸이 가정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 체제’의 슬아네 가족 내에서는 슬아 아빠가 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월급을 받는다. 슬아의 엄마는 슬아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출판사의 일을 도우며 아빠보다 두 배의 월급을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권이 있다면 기존의 가부장 사회의 통념 따위는 바뀔 수 있다는 소설 속 발상이 블랙 코미디처럼 다가온다. 그토록 굳건하게만 보였던 현대 ‘가부장’ 사회가 고작 돈으로 깨질 수 있는 ‘유리 벽’이라는 착안 자체가 흥미롭다.

 그나마 지금까지 읽었던 대한민국 작가들이 쓴 이런 책들은 가부장 사회의 관념을 예민하게 건드릴뿐 남녀 갈등을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6년에 출간된 노르웨이의 페미니스트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Gerd Brantenberg)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다르다. 뭐랄까, 더욱 급진적이다. 이 소설 속 사회는 이갈리아라는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가모장 사회를 표방한다. 이 나라에서 ‘맨움’이라 불리는 남성들은 어느 정도 성장한 나이가 되면 ‘페호’를 차야 하고 ‘움’이라 불리는 여성의 보호를 받아야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들은 ‘하우스 바운드’로서 ‘움’의 보호 아래에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가꾸고 가족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반면 ‘움’은 성격이 괄괄하고 활동적이며 농사일, 어업, 정치와 같은 바깥일을 주로 한다. 그들은 출산과 임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육아는 당연하게 ‘맨움’에게 맡긴다.


 이갈리아 사회의 생경한 모습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불편하다. 특히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가장 많이 안겨주는 부분은 책 속에서 주인공 ‘페트로니우스’가 쓴 소설 대목이다. 그는 이갈리아 사회에서 ‘가모장 체제’에 반기를 들고 혁신적인 책 한 편을 쓴다. 등장인물들은 그의 책을 보며 분노한다. 동시에 놀랍도록 혁신적인 책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있는 현실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 ‘혁신적이라 평가받는’ 그 내용들이 너무 익숙하고도 친숙하다.


(본문)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브램이 보고 있던 신문 너머로 아들에게 책망하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중략)

 “그렇지만 나는 뱃사람이 되고 싶다구요! 난 아기를 데리고 바다에 갈 거예요!” 페트로니우스가 당돌하게 말했다. (중략)

 여동생이 그를 비웃었다. 그녀는 페트로니우스보다 한 살 반 어렸지만, 늘 그를 못살게 굴었다. “하, 하! 맨움은 뱃사람도 될 수 없어. 남자 뱃사람이라니! 호호! 아니면 너는 선실 보이나 남자 선원, 아니면 ‘남자’ 타수가 되겠다는 거구나? 아구 우스워 죽겠다, 우스워 죽겠어.”(p.13-14)


<민주주의 아들>-주인공 ‘페트로니우스’가 쓴 소설

 “결국, 아들을 낳는 것은 여자야.” 베르그가 보고 있던 신문 너머로 딸에게 책망하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중략)

 “그렇지만, 저는 뱃사람이 되고 싶다구요! 난 아기를 데리고 바다에 갈 거예요.” 페트라는 영리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중략)

 남동생이 그녀를 비웃었다. 그는 페트라보다 한 살 반 어렸지만, 늘 그녀는 못살게 굴었다. “하, 하! 여자는 뱃사람도 될 수 없어. 여자 뱃사람이라니! 호호! 아니면 너는 아마 선실 걸이나 여자 선원, 아니면 여자 타수가 되겠다는 거구나. 아이구 우스워 죽겠다. 우스워 죽겠어.”(p.368-369)

출처: <이갈리아의 딸들>


 <이갈리아의 딸>의 저자는 미러링( 여성 차별적 언어표현에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 낸 비하적 표현의 모음, 또는 설득 전략)을 통해 현실 사회를 꼬집고 싶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남성 독자들은 이 책 내용들을 불편하게 여기다 못해 두려움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런 한편으로 지금 지구상 국가들의 가부장제 문화에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사실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책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현실과 상반되는 내용들에 통쾌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차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어차피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은 책 속의 이갈리아가 아니라 이곳 지구니까 말이다.


 가끔은 생각한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회는 더 이상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 속에서 살아갈 우리도 마음속 가득한 부정적인 기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누가 더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지를 따지기보다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럴 때도 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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