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번갈아 읽을 때처럼 대한다.
요즘 들어 단편소설과 장편소설들을 번갈아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이렇게나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함축된 단편소설을 읽을 때면 문장 하나, 마침표 하나, 등장인물의 행동 하나, 어조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분석해야 한다. 잠시 딴생각을 하며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가는 이야기의 맥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장편 대하소설을 대할 때는 또 다르다. 숱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삶과 죽음들이 널뛰기하는 작품 속에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착했다가는 엄청난 서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읽기를 포기하기 쉽다. 단편을 읽을 때는 개인의 시간에 집착해야 하고 장편을 읽을 때는 인간의 삶에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최근 미국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들과 박경리의 <토지>를 번갈아 읽으며 느낀 감상이다.
특히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은 상징과 은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쳤다가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 책은 카버가 쓴 여러 편의 단편이 실린 작품집이다. 그는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은 없지만, 내 작품의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것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작가이다. 카버는 리얼리즘을 추구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의 문체는 무척 불친절하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전지전능한 창조자로서 그야말로 소설 속 사건들을 바라보고 따라갈 뿐이다. 이런 성향 탓에 1983년 영국의 문예지 <그랜타>는 ‘더러운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동시대 미국소설의 경향을 설명하면서 레이먼드 카버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 기법은 ‘끔찍한 일을 다룰 때도 감정 표현을 아껴서 간결하고 함축성 있게 다루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로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그저 표면만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런 탓인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매번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교통사고로 당한 8살 아이의 일화가 소개된다. 의사는 병원에 실려 온 아이를 성실히 검사하고 진찰한다. 그는 매번 “계속 혼수상태가 아니다.” “괜찮다.”라는 말로 안심시키고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아이의 상태에 대해 심각성을 가지지 않는다. 아이의 부모는 걱정하지만, 그저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결국 아이는 드러나지 않은 출혈로 죽는다. 이때 작가가 선택 방식은 길고 긴 의료분쟁의 시작이 아니다. 8살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찾으러 간 빵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이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삶이라고 알려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한들 바뀌지 않는 현실의 차가움을 일깨워 주고 싶은지 알 수 없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끝 문장, 마침표까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과 계속해서 내용을 곱씹어 봐야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지금까지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다시 찾아봐야 할까? 오로지 혼자서 이해하기는 무척 힘든 작품이다.
반면, 박경리의 <토지>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보다는 좀 더 친절한 소설이다. 예측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심리, 행동들이 잘 표현되어 읽기가 수월하다. 다만 사람들의 삶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초장부터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삶에 집중하며 읽다가는 숱한 죽음과 삶의 연속에 마음 앓이를 할 수 있다.
<토지>의 첫 감상은 하동 평사리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최참판댁의 웅장한 기세였다. 고민거리는 오직 별당 아씨와 구천의 불륜이 전부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참판댁의 기둥인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죽고, 조준구가 재산을 차지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특히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각박해진다. 개인의 불행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이름을 잃은 조국을 향해 사람들의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며 갈등들은 더욱 번식된다.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 조국은 더 이상 조선인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길을 도모하고 순리에 따라 죽음을 맞이한다.
<토지> 13권째 읽고 보니, 애정과 관심을 주며 따라왔던 사람들은 이미 많이 죽었다. 용이와의 사랑만을 꿈꿨던 월선은 용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첫 남편이 최치수의 살인죄로 죽은 후 임이네도 돌봐주던 용이의 곁에서 영원히 기생충처럼 들러붙을 것 같았지만, 결국 병으로 죽었다. 조준구에게 복수를 꿈꾸며 악착같이 재산을 되찾았던 서희도 결혼을 하고 중년이 되었다. 이제 <토지>에서의 주인공은 용이, 월선, 구천, 서희, 길상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이요, 손자들이다.
<토지>에서 표현되는 박경리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혜안들은 존경스럽기만 하다. 그중, 가장 놀라운 부분은 등장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작가는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조연들에게도 서사를 부여하고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토지> 1권에서 그저 ‘살인자의 첫째 아들’이자 잠시 등장하는 등장인물로만 보였던 김평산의 큰아들 김거복은 부모의 죽음 이후 독립투사를 괴롭히는 밀정으로 변신한다. 선한 성품의 월선은 임이네의 아들 홍이를 자식처럼 거두어 키운다. 돈만 밝히는 어머니 임이네의 욕심으로 삐뚤어질 수 있었던 홍이는 그 애정으로 훌륭한 장정으로 자란다. 이 소설 속에는 무엇하나 허투루 넘길 ‘천한’ 사람이 없고, 특별히 대우해야 할 ‘귀한’ 인물도 없다. 방대한 시간 흐름 앞에 사람들의 모습은 평등하다. 이렇게 긴 세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토지> 속 인간들의 삶을 보고 있자니, 절로 겸손해진다.
간혹 현재 이 순간을 단편소설을 보듯이 대할지, 아니면 장편소설 읽듯이 대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눈앞의 일에 연연하며 분석하면 살지, 아니면 거리 두기를 하며 평정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헷갈린다. 어쩌면 아니 에르노가 소설 <세월>의 첫머리에 묘사한 이 문장이 그 고민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안톤 체호프)
2024년 현재의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 속의 삶은 같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삶, 뒤돌아보는 삶, 화려한 관심을 추구하는 삶, 허덕거리며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삶 등등, 출발점이 다르고 과정이 다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모두가 한 가지 인생의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명료하고 생생한 순간들이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고, 먹고 자고 일하고, 웃고 화나는 생생한 현재의 시간은 흐릿한 액자 속의 사진들 속으로 박제되어 언젠가는 추억에서만 반짝일 것이다. 그때까지 난 어떨 때는 단편소설을 읽는 심정으로, 어떨 때는 장편소설을 읽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