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으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솔 벨로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이다. 1915년 캐나다 퀘벡주 라신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부부의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벨로는 아홉 살 때 미국 일리오아주 시카고로 이주했다. 그는 시카고대학교, 노스웨스턴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미네소타대학교, 뉴욕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시카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인류학, 문학 등을 가르쳤다. 밸로는 1941년 첫 단편 <두 개의 아침 독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오기 마치의 모험>(1947), <허조그>(1964) <샘러 씨의 행성>(1970)으로 세 차례 전미도서상을 타는 기록을 세웠다. 1976년 <험볼트의 선물>(1975)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같은 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이며 당대 문화를 섬세하게 분석했다”라는 평을 들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험볼트의 선물>(솔 벨로, 문학동네, 2024)은 화자 ‘찰리’의 시선으로 그의 스승이자 천재 시인이었던 ‘폰 험볼트 플라이셔’의 몰락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세속적인 자본주의와 급변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험볼트와 찰리의 삶을 교차로 보여주며 차가운 현실 속에서 순수함을 추구했던 예술가의 현실과 고민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벨로는 주인공 험볼트를 자신과 함께 동시대에 활동했던 실존작가, 델모어 슈워츠를 모델로 했다. 슈워츠는 스무 대 중반 뛰어난 시와 소설로 주목받았으나 편집증적 망상과 알코올중독에 빠져 허망한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작가는 20세기 중반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과 불확실성, 실존적 위기를 험볼트와 그의 제자 찰리의 관계와 삶 속에 섬세하게 담았다.
소설은 화자 ‘찰리’의 회고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스승 험볼트와의 만남부터 죽음까지 담담한 어조로 설명한다. 젊은 시절 찰리는 험볼트의 시에 감명받아 시인을 만나기 위해 단돈 30달러를 들고 그리니치빌리지로 무작정 달려갔다. 험볼트는 찰리를 예술의 길로 이끌며 문학 멘토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시인은 점점 몰락하고 그에 반해 찰리는 작가로 크게 성공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험볼트는 조울증, 피해망상, 의처증에 시달리고, 급기야 제자인 찰리의 희곡 <폰 트렌트>가 상연되는 극장에서 통속적 대중작가라 비방하며 시위한다. 이미 부와 명예를 거머쥔 찰리는 험볼트의 비참했던 마지막을 외면하고 그와 같은 삶을 걷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50대 후반의 찰리는 명망 있는 작가, 대도시 시카고의 부유한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삶 역시 평탄하지 않다. 그는 전처 ‘데니즈’와의 이혼소송을 벌이느라 파산지경이고, 30대 여자 친구 ‘레나타’는 그에게 예전 남자의 아이를 맡기고 새로운 남자와 신혼여행을 떠났다. 주변에는 찰리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 투성이다. 모든 것을 잃고 스페인의 어느 싸구려 하숙집에서 숨죽여 지내던 어느 날, 찰리는 무덤에 있는 험볼트로부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 소설을 이루는 이야기의 축은 크게 두 가지다. 화자인 ‘찰리’가 스승 험볼트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며 본인의 기억을 더듬는 서사와 찰리의 현재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야깃거리를 다룰 때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펼치지 않고 먼저 굵직한 현재의 결론을 먼저 보여준다. 그런 다음, 그는 이후 여러 에피소드를 첨부하고 나열하는 식의 독특한 이야기 풀이 방식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소설 초반에 화자 찰리의 고백으로 첫 시집 <할리퀸 담시집>으로 명성을 얻은 험볼트가 삼십 년 후, 노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던 “바워리 중심부 웨스트포티스의 싸구려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p.16)했다는 사실이 일찌감치 밝혀진다. 독자들은 전도유망했던 유명한 시인이 왜 그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미궁에 빠진다. 작가는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한 개의 굵직한 사실 속에 여러 가지 진실들을 불려 나가는 방식으로, 20세기 미국 변화된 사회상과 함께 쉴 새 없이 바뀌는 대중의 입김을 맞춰야 했던 유대인 예술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험볼트는 예술을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사랑했다. 극도로 황폐해졌을 때도 험볼트 안에는 부패할 수 없는, 썩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시인이어서 처해야 했던 어떤 상태에 들어가면, 그는 캐슬린이 자신을 보호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언제나 미국의 비난에 구멍이 뚫리고 찢어지던 그 꿈꾸듯 고양된 상태를 캐슬린이 지켜주었으면 했던 것이다.(p.373)
예술의 순수성을 사랑했지만, 세속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시인 험볼트는 결국 돈에 굴복하며 “시인이 그래선 안 되겠지만, 만일 내가 돈에 집착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p.249)라고 말한다. 그는 결국 시인의 순수성을 버리고 다른 일을 얻기 위해 “시인이라는 명성을 이용”했다. 그런 험볼트의 모습을 보며 찰리 역시 이렇게 읊조린다. “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비세속적이라고 주장하기엔 내가 너무 영리하기 때문이었다.”(p.345)라고. 험볼트와 찰리의 성공과 실패는 대중의 입맛을 잘 맞춘 예술가의 처세술과 시대를 잘 만난 작품의 운이 갈라놓았다.
<험볼트의 선물>은 대도시 시카고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예술가들의 고군분투를 볼 수 있는 소설이다. 거대한 자본주의 물결 속에 순수성과 창작력을 고수하는 예술가들이 현실적 고민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예술가들의 혼란과 대도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험볼트의 과거와 찰리의 현재를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이 점은 주요 사연과 중요한 등장인물에만 집중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이 불편해할 요소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작품은 772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굵직한 사건들이 별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책의 제목이자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험볼트의 선물’ 대목은 이것과 관계없어 보이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지난 뒤 거의 책의 끝부분에야 등장하기에 읽는 이들의 인내심과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안겨준 이 작품이 궁금한 사람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인의 길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여기서 한 번쯤 “시인은 꿈을 꾸어야 하는데, 미국에서 꿈을 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p.482)라는 험볼트의 말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