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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랑과 결함>(예소은, 문학동네, 2025) 서평

by 하늘진주


“나는 불행 포르노를 즐겨 보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잘못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또 실제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잘못되는 광경을 보고 싶어 하진 않았다.”(p.331) ‘내가 머물던 자리’ <사랑과 결함>


예소은의 첫 소설집 <사랑과 결함>(2025, 문학동네)은 ‘사랑과 결함’이라는 모순된 표제작 제목을 붙여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 미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제일 사랑”(문지문학상 수상 소감)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작품집 각 단편을 읽다 보면 대부분 여성인 화자들이 느끼는 사랑의 잔상들이 아슬아슬하게 펼쳐진다. 그들은 지독한 감정에 빠져드는 주인공이었다가 때로는 철저한 삶의 방관자가 되어 상황을 외면하기도 한다. 문장마다 느껴지는 섬세한 감수성과 독자들의 과한 몰입을 적절하게 끊어내는 서늘한 거리감이 예소은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등단 5년 차인 예소연 작가는 202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가는 애써 무언가를 증명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했다. 예소연은 데뷔 3년 만에 이효석 문학상, 문지문학상, 황금 드래건 문학상을 받았고 일찌감치 한국문학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단편 ‘그 개와 혁명’이 2025년 이상 문학상 대상을 타며 또 한 번 작가의 잠재력을 과시하고 있다. 1992년생, 올해 33세의 신예작가가 보는 세상 속 사랑의 형태는 마냥 부드럽고 달콤하지 않다.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아프고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헌신적이다. 다양한 사랑의 민낯과 고군분투하는 삶의 모습들이 작품집 <사랑과 결함>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소설집에는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화 ‘철봉 하자 우리’의 원작 소설인 첫 번째 단편인 ‘우리 철봉 하자’는 크로스핏 센터에서 만난 맹지와 석주가 천천히 서로의 삶에 침범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뒤이어 소개되는 연작 소설인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성장소설 3부작이다. IMF 시기, 어른들의 고난과 아픔을 한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희조와 미정의 초등 시절의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빠가 죽은 후 전학을 갔던 미정이 돌아오며 시작되는 중학교 시절,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막 발을 내디딘 희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이야기까지 어려운 시절을 통과한 한 여성의 성장기를 3부작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표제작 ‘사랑과 결함’은 부모 대신 어린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순정이 애물단지 취급받는 현실과 투쟁을 조카 ‘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소설이다. ‘팜’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 이야기를, ‘그 개와 혁명’은 장례식의 촌극을 통해 사회적 관습과 개인적 갈등을 풀어간 과정을 유쾌하게 다뤘다. ‘분재’는 칠십 대 여성 ‘차연’의 죽음에서 중심으로 딸 ‘수진’과 손녀 ‘윤재’로 이어지는 세대 갈등을 담았다. ‘도블’과 ‘내가 머물던 자리’는 서로 멀어져 간 사회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노력이 실렸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제목 ‘사랑과 결함’처럼 다양한 사랑의 민낯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녀 간의 사랑, 가족의 애정, 친구들과의 우정 등등 한 여성이 세상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감정이 각각의 단편들에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이에 관한 작가의 시선이다. 소설가는 주변에서 각각 사랑의 행태에 지극히 냉정하고 ‘관찰자’ 시선을 잃지 않는다. ‘우리 철봉 하자’의 희조는 남자 친구에게 휘둘리는 ‘맹지’의 맹목적인 사랑에 대해 “왜 쓰레기 없이 살 생각은 안 하냐고. (...) 나도 충분히 너한테 잘해줄 수 있는데 왜 나 없으면 살 수 있고 쓰레기 없으면 못 살아?”(p.20)라고 비웃는가 하면,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p.33)라고 자기비판을 한다. 표제작 ‘사랑과 결함’에서는 조카의 시선으로 “나에게 흠뻑 사랑을 주던 고모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증오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나에게 흠뻑 사랑을 주던 고모에 의해 삶을 비관”(p.182)하는 물고 물리는 애증의 관계가 묘사된다. ‘분재’에서의 ‘수진’은 남편의 죽음 이후 끊었던 술을 입에 담으며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해도 미안해할 것이 생겼다”(p.272)라고 말한다. 작가가 지켜본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려 버리는 무기면서도 한없이 상대적 약자로 만드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맹목적으로 휘둘리고 고통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몇 번의 시련이 지나간 다음에야 ‘맹지’는 거짓말을 일삼는 남자 친구에게 욕을 퍼붓고, 조카는 고모의 임종 뒤 가족의 뒤엉킨 감정을 인식하고, ‘수진’은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를 토해낸다.


3부작 연작소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사랑의 민낯보다는 ‘희조’의 심리묘사와 고단한 인생에서의 고군분투가 더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자신의 출생으로 직장을 그만둔 엄마의 은근한 폭력과 아빠의 무관심한 방관 속에서 희조는 미정과의 우정에 목매지만, ‘미정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몇 년이 지난 후 희조는 미정과 재회한다. 하지만, 친구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고민 끝에 옛이야기를 꺼내도 돌아오는 것은 미정의 왕따뿐이다. 결국 희조는 가족의 품을 떠나 유흥가에서 일하며 잘 살기를 택한다. 잦은 고난 속에서 그녀는 결국 깨닫는다. 희조는 그동안 철저하게 관조자의 입장이자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p.133)고, 외부자 역할이었기에 인생에서 ‘잘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자신이 유일하게 원했던 것은 “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열망”(p.146)이었다고. 매 순간이 어려웠던 희조는 어긋난 시작점을 찾아 누군가를 탓하기도 하고 상황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깨닫는다. 이 모든 일은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적극적으로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았던 자신 탓이었다는 것을. 한 여성의 홀로서기에 관한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잘 드러난 단편이다.


소설집 <사랑과 결함>은 제목처럼 다양한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사랑의 형태와 보답받지 못한 관계의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가족 내에서, 사회관계 속에서 각각의 아픔을 지닌 여성들이 이야기를 이끌기에 작품 속 분위기가 마냥 밝지마는 않다. 여성의 우정, 가족 관계, 사회 속 인간관계 등 하나의 이야기로만 매듭지어진 각각의 단편들과 달리, ‘초등’, ‘중학교’와 그 이후를 다룬 3부작 연작 소설은 홀로 한 여성 성장기의 색채를 띠고 있어 읽는 이들의 취향에 따라서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게다가 과감하게 펼쳐진 독창적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여성의 갈등’ 중심의 유사한 주제 반복과 적당히 거리를 둔 듯한 절제된 서술 방식이 단편들 대부분을 비슷한 부류의 작품으로 읽히게 만들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해가 갈수록 성장하는 행보를 보이는 작가이기에 그녀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두 번째 소설집을 고대할 수밖에 없다. 세밀한 심리묘사가 담긴 여성 서사를 읽고 싶은 사람들,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음미하길 원하는 독자들, 사소한 것들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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