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많이 보고 있나요?
라는 질문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우리말은 상황과 어감, 청자의 관점과 관심사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많아 무척 흥미로운 단어이다. 이번에 준비한 시 토론에서는 ‘보다’라는 동사로 선생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어떤 분은 ‘많이 보다’를 글자 그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많이 보고 있다’라고 해석했고, ‘다른 것을 깊이 관찰하며 보다’로 답변한 선생님도 있었다. 단순히 ‘보다’가 ‘관찰’이 되고 ‘관심’과 ‘희망’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며 이 동사 속에는 인간관계 속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과연 ‘많이 보고 있을까?’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안미옥, 문학동네, 2025)의 시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시인이 일상에서 본 풍경들을 감각적으로 사유한 45편의 작품 속에는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라는 제목의 시가 없다. 3부 ‘점심에 만나요 환해져요’의 마지막 시, ‘사운드북’의 맨 마지막 행의 시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이 툭툭 던지는 시어 속에서 ‘많이 보고 있어요’의 의미가 무엇일지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와 ‘저는 많이 보고 있지 않아요’의 두 가지 선택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에서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의견을 많이 남겨 주었다. ‘저는 많이 보고 있지 않다’라는 선택한 분들은 “예전에는 많이 보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많이 보고 싶어서”, “많은 것을 다양하게 보고 있지만, 좀 더 깊이 보고 싶어서” 등등의 의견을 냈다. 같은 선택을 했지만, 고른 이유와 앞으로 하고 싶은 소망과 각오 등이 각각 다른 점이 흥미로웠다. “많이 보고 있지 않다”라는 말속에 선생님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춤추듯이 들락거리는 느낌이랄까? 바쁜 일상에서 미처 보듬지 못한 감정에 대한 미안함, 앞으로 지금보다 잘 살고 싶다는 희망이 동사 속에 묻어났다.
‘저는 많이 보고 있다’라는 선택을 해주신 선생님은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 이 선택을 했다며 요즘 일상을 들려주었다. 외부 강사인 그녀는 그동안 학생들을 ‘많이 보고 있다’라고 여겼다고 전했다. 하지만, 특히 올해 다양한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공부를 못해서 많은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동시에 만나다 보니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잘하는 학생들이 속한 반을 주로 담당했던 그녀는 수업을 잘 못 따라가는 아이들을 접하면서 고민이 많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동안 학생들을 ‘많이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다’라고 여겼지만, 익숙한 교수법에 매몰되어 아이들의 고민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를 반성했다고 했다. 그 의견을 듣는 순간, 나 역시도 지금 만나는 학생들을 ‘많이, 세심하게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많아졌다. 수업 진도에 급급해서 아이들의 반응을 놓친 것은 없는지 고민이 되었다.
시집으로 토론을 진행하다 보니 기존의 소설이나 인문 도서로 진행할 때보다는 새로운 느낌이다. 시는 혼자 읽을 때보다 함께 낭송하고 의견을 나눌 때 더 빛을 발하는 문학 장르이다. 시 토론을 진행해 보니, 일상을 관찰하며 시 속에 사유의 언어로 담아낸 안미옥 시인처럼, 참여자들이 빚어내는 삶의 발자취를 시처럼 엿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다들 즐거운 시간이었을까?
우리네 삶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더 많기에 시에 더 가깝다고 여긴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예측할 수 있는 인생이 완성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물다. 수많은 선택의 길 앞에서 고민하고 투쟁하며 살아가야 한다. 꺾어진 길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야 할지,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숲길을 선택해야 할지, 아니면 드문 진흙 길을 택해야 할지는 가봐야 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그래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이겠지. 그래서 시가 어렵고 인생이 어렵다.
선생님들과 시 토론을 무사히 끝낸 오늘만큼은 시인과 시, 내 마음과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라는 시인의 읊조림, 나도 많이 보면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