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거를 밟고 현재를 걷는 여정, 행리단길

K-아줌마, 바쁘지만 느린 수원에서 다정함을 배우다

by 하늘진주

남편의 직장 이전으로 수원에 자리 잡은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교과서에 실려 있던 역사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정조의 꿈이 설계된 도시답게, 수원은 옛 시간의 자취와 현대의 생활감이 묘하게 겹쳐 있는 곳이었다. 길게 펼쳐진 성곽을 올라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면 이 광경을 살펴보았을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웅장함에 붙들리곤 했다. 단단하고 반듯한 돌로 지어진 화서문을 지나 우리 동네로 향할 때면, 그 감각은 금세 일상의 무심함 속으로 스며들었다. 역사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재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한양을 바라보며 걸어왔을 보부상들 역시 성곽을 보며 감동하고 또 이 문을 지나며 잠시 숨을 고르지 않았을까. 굽이굽이 산길 끝에서 만나는 도심의 소란과 사람들의 생기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묘한 몽롱함을 남긴다.


정조대왕이 한양을 바라보며 ‘중국 장안성처럼 융성한 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 붙인 북쪽의 장안문이나, ‘사방으로 통한다’는 뜻을 품은 남문의 팔달문에 비해 서쪽의 화서문은 이름부터 담담하다. ‘화성의 서쪽’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지닐 뿐, 큰 포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사람들이 무심히 오가며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문에 가깝다. 화서문을 중심으로 시간의 속도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이 문을 넘나들며 사람들은 현대의 바쁨과 과거의 느긋함 사이를 오간다. 마치 잠시 다른 시간의 결로 옮겨 타는 것처럼. 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젊은 연인들과 관광객들이 뒤섞여 걷는 행리단길이 펼쳐진다. 꼬불꼬불한 골목 사이로 알록달록한 소품 가게와 작은 맛집, 개성 넘치는 카페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고, 손은 카메라를 찾게 된다. 그곳에서는 질서 없이 피어난 풀 한 포기나 오래된 대문 하나까지도 저마다의 얼굴을 가진 피사체가 된다.


행리단길에는 감정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분명한 ‘느린 속도’가 있다.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장면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길이 지나온 시간과 자연스레 연결 짓는다. 정조대왕이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을 수원의 풍경을 중심으로, 이 거리를 오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상상해 본다. 골목 한편에 남아 있는 점집과 무당집 앞에서는 기복신앙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버텨냈을 옛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고, 다 쓰러져가는 철물점이나 문을 닫은 작은 점방 앞에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삶의 터전을 접어야 했을 누군가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행리단길은 젊은 사장들의 발 빠른 시도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의 현실이 동시에 겹쳐 보이는 거리다. 그래서 행리단길은, 시대의 부름에 맞춰 빠르게 바뀌는 현재 위로 아직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과거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이기도 하다.


생활의 복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면 나는 행리단길을 향한다. 조용한 동네를 지나, 화려한 스타필드의 후광을 등 뒤에 두고 걷다 보면 어느새 차와 버스가 오가는 도로에 닿는다. 분주한 시내의 생활감이 짙게 밴 거리를 지나 화서문을 통과하는 순간, 시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그 문 너머에는 마치 또 다른 무대 장막 위에 와 있는 듯한 행리단길이 펼쳐진다. 이곳은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해외 관광객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은 노란 우산 아래서, 파란 철문 앞에서 미소를 지은 채 연신 셔터를 누른다. 등장인물들이 손을 잡고 걸었던 거리,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장면이 남아 있는 장소 하나하나는 그들에게 한국을 기억하는 작은 기념물이 된다. 속으로는 ‘저렇게까지 사진을 찍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피식 웃다가도, 관광객이 드문 순간이면 나 역시 몰래 풍경 한 컷을 마음속에 담는다. 잘 포착된 드라마의 장면처럼, 이 거리는 시간과 장소를 건너 오래 남는 기억이 된다.


행리단길은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장소라기보다,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품은 하나의 타임머신에 가깝다. 이 길을 스쳐 지나간 이들의 이야기는 골목의 오래된 벽과 문틈, 닳아버린 계단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비 오는 날에는 비와 함께 걷는 이야기로, 눈 내리는 날에는 하얗게 덮인 집들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상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이 길 위에서 시간의 발자취에 조용히 젖는다. 이 거리는 언제나 ‘머무는 사람’보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으로 완성되는 공간이다. 장안문을 지나 한양을 바라보며 걸었을 땀내 나는 보부상의 눈으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운치에 잠긴 관광객의 눈으로, 그리고 삶의 시름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주민의 눈으로. 행리단길은 그렇게 서로 다른 시선을 겹겹이 품은 채, 오늘도 조용히 밝혀지고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