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이용한 글쓰기 논쟁에 관해 이미 한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AI를 사용하는 이들에 관한 부정도 옹호도 하지 않은 채 '쓰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그 글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AI를 이용하면 쉽게 글을 쓸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주변 지인들을 보며 겉으로는 웃지만, 내심 '쉽게 쓰인 글'에 대한 반감이 조심스레 도사리고 있다. 이런 감정은 글쓰기가 꾸준한 시간을 들여 졸인 뚝배기 같은 노력의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나만의 고집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창작하는 이라면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이건 국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부터 키워온 나만의 작가 이미지였다. 몸에 남겨진 고통의 흔적만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생생한 경험을 위해 가출도 하고 걸인 행세한다는 작가들의 유언비어가 은연중에 진실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작가라면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도,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한 채 홀로 골방에 갇혀 긴 시간 동안 창작을 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길거리로 나서기에는 너무 소심했고 겁도 많았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특별한 재능도 있어 보이지 않았고, 끝까지 창작의 길을 밀고 나가려는 뚝심도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작가의 꿈만 꾸며 여러 가지 가상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리다가 재능의 한계를 내세우며 일찌감치 글쓰기를 포기했다. 몇십 년이 지나서야 내가 지녀온 ‘창작의 고통’이 진실한 문학의 본질이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요즘 시대의 문학은 예전처럼 고통의 기록, 생생한 경험만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근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담은 묵직한 문학은 여전히 작가 지망생들과 순수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읽히지만, 대부분 대중은 ‘웹툰’과 ‘웹소설’, ‘추리물’과 ‘공포물’처럼 인간의 심리와 감정, 그리고 상상력을 다양하게 다루는 장르 소설도 문학의 범주에 넣고 즐긴다. 순수 문학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작가라 불리지 않는 것은 아니요, 오히려 작가라는 이름의 범위는 예전보다 해석의 여지가 많아졌다. 순수 문학의 꼿꼿한 방어막 속에서도 장르문학과 웹소설이 이미 어엿한 문학의 범주에 뚫고 들어간 지 오래다.
예전보다 작가들이 도전할 수 있는 문학의 길은 넓어졌지만, AI를 이용해서 쉽게 무임 승차하려는 이들의 글쓰기 행태가 여전히 썩 내키는 것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기술을 사용해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보다 오랜 고민과 사색의 결과 없이 키워드 중심으로 써지는 기계적인 글에 분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나라 시인 가도가 ‘밀다’와 ‘두드리다’를 고민하며 나온 ‘퇴고’의 치열함이 AI에 의해 퇴색되는 현실에 비통함마저 느낀다. 인간의 글쓰기는 한 번에 쓰인 기계식 글쓰기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초고를 쓰고 고치며 다듬는 창작 과정에서 완성이 된다. 인간이 지닌 창작의 아름다움은 쓸모없는 초고를 계속 바라보고 흠을 재단하는 인내심의 고통에서 더 빛난다.
그럼에도, ‘이제는 문학이 고통의 서사에서 이별해도 될까?’라는 질문에 대해 쉽게 단정하며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변화하는 시대를 바라봐야 할까? 진정한 창작의 고통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곱씹는 질문을 나는 다시 한번 되새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