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에세이>(발터 벤야민, 현대문학, 2025)
“이야기 기술은 왜 사라져 가는 것일까? (p.85)”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개인주의가 진행된 후 독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의 운명’에 깊이 사유했다. 그의 염려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매일 쏟아지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방대한 서사를 1분 내외의 자극적인 결론으로 압축하는 숏츠(Short-form) 콘텐츠와 단 몇 초 만에 기승전결을 갖춘 텍스트로 뚝딱 만드는 생성형 AI의 작업물들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의 지혜'라기보다 '소비되는 정보'에 가깝다. ‘진짜 인간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땀내가 나는 과정이 사라지고 차가운 결과만 남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경험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의 역할을 고민한 발터 벤야민의 비평 열세 편과 그가 인용한 원전이 함께 수록되어 <이야기꾼 에세이>(현대문학, 2025)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경험의 가치 하락’과 ‘이야기의 종말’ 등 벤야민의 총체적인 사유를 담은 문학 에세이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계 철학자이자 문예학자, 비평가다. 그는 1919년 베른 대학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25년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애극의 기원」으로 학계 진입에 실패한 이후 벤야민은 강단이 아닌 광장에서 비평과 번역, 방송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이어 간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던 그는 결국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벤야민은 철학과 문학, 신학과 문화 비평 등을 깊이 연구하며 근대 사회에서 경험과 이야기, 예술과 매체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저서로는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이야기꾼> 등이 있다.
<이야기꾼 에세이>는 발터 벤야민이 망명 중 생계유지를 위해 스위스 잡지에 발표한 에세이 <이야기꾼>을 중심으로 엮은 산문집이다. 브라질 편집자이자 문학 번역가인 새뮤얼 타이탄은 이 글을 비롯해 벤야민의 다른 글들과 여러 저자의 글을 함께 수록하며 작가의 사유를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편집자는 서문에서 당시 이 글이 실렸던 잡지의 구독자가 35명에 불과했으며, <이야기꾼>이 “어떤 것도 성공담을 구성하는 소재”를 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문학 에세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p.10)라고 평가한다. 이 책에는 ‘이야기 기술의 소멸’, ‘공유 경험의 소실’, ‘이야기와 소설의 비교’, ‘지루함의 미학’, ‘죽음의 의미’와 같은 주제가 길고 짧은 글 속에서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벤야민이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이야기꾼의 몰락이다. 그는 주요 원인으로 지루함을 견디는 ‘권태의 부족’과 그 시간을 공유하는 ‘청자의 상실’을 꼽는다. 벤야민이 생각하는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도록 ‘끝없이’ 지루한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권태는 경험의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꿈의 새”(p.139)라는 그의 말처럼, 마음의 이완과 다양한 경험은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는 산실이다. 그러면서 이야기꾼은 설명을 최대한 자제해 “간결하게 이야기”(p.139)하고 청자의 경험을 건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타인의 이야기가 내 안의 경험으로 스며드는 ‘경청의 시간’이다. 하지만 “실을 잣거나 천을 짜거나 나무를 깎아 표면을 다듬어 물건을 만드는 업장들”(p.86)이 없어지면서 청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과거 사람들은 물레를 돌리거나 뜨개질하는 지루한 손노동을 하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공간에서 길고 긴 시간을 공유하며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지만, 기계화와 산업화는 이야기의 탄생도, 청자의 몰입도 모두 사라지게 했다. 이런 변화 양상은 단 1초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채 인공지능에 작업을 맡기며, 경험을 체득하고 깊이 사유할 기회가 사라진 오늘날 사회 모습과 유사하다.
벤야민은 이야기꾼 몰락의 또 다른 이유로, 폴 발레리의 고찰, “영원함에 대해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을 점점 싫어하게 되는 것은 같은 맥락인 듯하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죽음의 의미를 언급한다. 그는 ‘영원에 대한 사유’에 대해 “가장 강한 동기를 제공한 것은 늘 죽음이었”(p.143)지만, 19세기에 형성된 부르주아 사회의 ‘각종 위생 수칙과 사회 규범’, ‘사적 습관과 공적 관습’으로 인해 사람의 죽음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점차 금기시되었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이런 변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죽음을 앞둔 사람이 평생 쌓아 온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전할 기회 역시 함께 사라졌다고 설명한다. “이야기꾼의 권위는 죽음으로부터 나온다.”(p.145)라는 그의 말은,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기억하던 공동체적 삶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애도의 표현처럼 들린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이집트 왕 프시메니투스의 일화가 자주 언급된다. 포로가 된 왕은 자식들의 비극 앞에서는 침묵하다가, 초라해진 옛 하인을 보고서야 통곡한다. 벤야민은 왕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끝내 설명하지 않는 점이 바로 ‘이야기의 진수’라고 말한다. 물론 편집자 새뮤얼은 서문에서 벤야민이 헤로도토스의 설명 부분을 놓쳤을 가능성을 언급하지만, 벤야민의 여러 글에서 이 일화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그가 특히 애호했던 이야기였던 듯하다. 다만 이와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점이 다소 아쉽다. 처음 읽을 때의 인상이 이러한 반복 속에서 점차 희석되어 강조라기보다 편집의 실수로 오인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벤야민이 말하는 ‘이야기꾼’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자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혜를 전하는 ‘스승이자 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 다시 말해, “자기 삶이라는 심지를 이야기라는 은은한 불꽃에 남김없이 타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p.173)이 바로 벤야민이 추구하는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벤야민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 에세이가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 진짜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은 문학 전공자, 현대 사회 읽기 문화를 고민하며 지적인 흥미를 추구하는 이에게 생각거리를 던진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야기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이야기꾼 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