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3월의 마치>(정한아, 문학동네, 2025)-서평

by 하늘진주
“내가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어때?” (중략)
“당신이 원한다고 언제까지나 이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생명이 다하면 끝이죠.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에요. 알츠하이머는 그전에 당신을 놓아주라는 신호예요. 그냥 놔버려요. 당신이 가진 모든 기억, 당신이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별 대단치 않은 실패들, 성공들, 전부 다요.”(p.228)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삶의 흔적은 인생의 일기장이라고들 한다. 그 기록들이 행복으로 가득하다면 몇 번이고 다시 들춰보고 싶겠지만, 고통만 가득하다면 살기 위해 스스로 ‘편집’하고 싶은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이라는 지옥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 여성이 알츠하이머와 VR(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이 제공하는 '가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과 화해하는 과정을 다뤘다.


작가 정한아(1982~)는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 2007년 장편소설 <달의 바다>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작 <친밀한 이방인>(2017, 드라마 <안나>의 원작)에서 ‘가짜 인생’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인물을 서늘하게 해부한 바 있다. 전작에서 타인의 삶을 훔쳐 사는 인물을 그렸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는 가상현실이라는 인위적인 공간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한 인물을 내세운다. 주인공 ‘이마치’는 한때 유명했지만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노년의 배우로, 긴 세월 동안 그의 내면에는 인생이 남긴 깊고 묵직한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다.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마치가 가상세계 속에서 기억을 다시 엮어 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묻는다. 고통스러운 진실까지 간직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거짓 속에서 안식하는 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인가.


소설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노년의 여배우 이마치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한때 무대와 스크린에서 타인의 삶을 연기하며 살아온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고 있다. 그녀의 삶에는 오래 지워지지 않는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아들을 잃은 이후의 시간 역시 그 상처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채 흘러왔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마치는 뇌 의학 클리닉을 찾고, 기억을 기반으로 맞춤 제작된 VR 치료를 권유받는다. 이후 그녀는 VR 기술을 통해 그동안 거쳐온 과거의 삶으로 재구성된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마치는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관리인 ‘노아’를 만나게 되는데….


기지촌 출신인 마치는 어린 시절부터 돌봄의 부재 속에서 자랐다. 그녀에게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p.24)뿐이었고, 가면을 쓰는 삶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되었다. 마치는 삶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깊이 고민하기보다 타인의 요구에 자신을 맡기는 방식을 반복해 왔고, 결혼과 출산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한 경험은 다시 다음 세대로 전이되었고, 이 인물의 삶에는 늘 피하고 싶은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삶의 축적 위에서 알츠하이머로 인한 망각은 그녀에게 비극이라기보다,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처럼 다가온다.


그럼에도 알츠하이머를 고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VR 치료는 기억을 되찾는 공간이자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p.137)였다. 그녀는 ‘라파 르망’이라는 가상현실에서 비로소 무거운 고통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마치는 자신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아들과 딸, 그녀의 무능과 무지로부터 안전한 아이들”(p.228),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관리인 ‘노아’에게 애착을 느끼며 현실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외친다. “이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p.228) 그러나 현실은 마치에게 끝내 머무를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기억은 “모래시계처럼 쏟아졌다가 다시 차오르며”(p.235), 그녀를 현재로 강제로 되돌려놓는다.

<3월의 마치>는 평생 남의 삶을 연기해 온 배우가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생의 의미를 복원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가상현실 속에서 마치의 엄마, 마치, 마치의 딸로 이어지는 세 모녀의 인생 파편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독자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다만 가상현실과 기억 회귀라는 SF적 설정은 일부 독자에게 다소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치매 환자의 파편화된 인식을 따라가는 서술 방식은 마치의 삶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이야기의 시선이 주인공에게 집중되면서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데에는 시야가 다소 좁아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를 지닌 이를 돌보는 이들, 나이 듦과 기억 상실을 두려워하는 독자들에게 깊은 질문을 건넨다. 망각을 통해 얻는 평온이 과연 구원인지, 혹은 책임으로부터의 후퇴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작가는 그 판단을 독자에게 넘긴 채, 한 여자가 선택한 마지막 삶의 방식을 <3월의 마치>를 통해 조용히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