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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Nov 15. 2020

지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삼성백혈병'과 지식정치




 
           한평생 건강하던 당신이 갑작스럽게 큰 병에 걸렸다. 같은 장소에서 일해온 동료들도 같은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직장 측에서는 ‘어디 한 번 인과관계를 입증해보시오’라고 말한다. 정부 산하 기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병을 산업재해로 인정받고, 억울함을 풀고, 적절한 보상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김종영과 김희윤(2013)은 18개월 간의 참여관찰, 인터뷰 등 현장 연구와 문헌 연구를 토대로 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의 사망 이후 삼성-정부, 피해자-대항 전문가 간의 지식 투쟁 과정을 분석한다.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4명이나 더 있음을 알게 됐다. 특히 황유미 씨와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 역시 갑작스럽게 사망했음을 발견한 황상기 씨는 백혈병을 집단적 질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는 두 기자의 취재로 공론화되었다. 이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 위원회가 기흥 공장 정문에서 발족했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에는 환자, 운동가, 전문가, 인권단체, 운동단체 등이 참여하며 집단적 질병의 정치화가 이뤄졌다.


           반올림은 질병에 걸린 제보자들을 조직하고 재해경위서, 업무관련성평가서, 의사소견서를 작성하여 산업재해보험을 신청하는데 주력했다. 이는 대항 전문가의 의료지식과 과학지식이 동원되는 핵심 과정이었다. 또한, 거리시위를 통해 이슈를 알리고, 언론, 정치권, 국제단체 및 해외전문가와의 연대를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행정소송에 전문가와 증인을 동원하여 산재보험의 승인을 이끌어냈다. 반올림의 활동이 행정소송에서의 증명까지 확장된 이유는, 초기에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산재신청 기각되었고, 행정법원에서는 증명의 부담이 환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항 전문가와 반올림은 2009년 7월부터 세미나 통해 공동 교육을 진행하고, 제보자와 증인을 포섭하여 승소 판결을 얻어내는 데 주력한다.


       ʻ삼성백혈병ʼ 투쟁의 핵심은 환자의 질병이 공장 환경과 인과적 관계가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법률에서는 <직업병의 판정>에서 확고하고 기계적인 인과관계보다 ‘상당인과관계ʼ를 채택하고 있다. 상당인과관계 성립의 세 가지 기준은 유해물질 존재와 노출 여부, ʻ충분한ʼ 노출 여부, 의학적 인정여부이며,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래서 반올림과 삼성은 이 세 가지 기준과 관련하여 경합을 벌이며 직업병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데 주력했다. 반올림 측의 지식 구성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산보연 측에서 ‘사업장 내 유해 물질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자 반올림은 피해자들의 현장 관련 증언, 삼성반도체 엔지니어의 ‘환경수첩’에 포함된 유해 물질 리스트, 서울대학교 보건대학 백도명 교수를 중심으로 한 대항 전문가의 과학적 논문(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성 평가)을 통해 유해물질이 존재했다고 반박했다. 충분한 노출 여부와 관련해서 산보연이 ʻ백혈병의 원인 요인에 노출 수준이 자연 노출 수준으로 낮다’며 산재 신청을 기각하자, 반올림은 산보연의 판단에는 현장 노동자가 경험한 간헐적 누출 사고 등이 포섭되지 않는다며 충분한 노출 기준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의학적 인정 여부와 관련하여 산보연은 질병 발생에 있어 명확한 원인 파악이 어렵다는 점을 노동자들의 백혈병을 직업병으로 규정 불가한 근거로 사용했다. 이에 반올림은 미국 산업위생사협의회 등 공신력 있는 해외 기관, 해외 연구 자료를 통해 반도체 산업과 백혈병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과학적 근거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경합에 참여했다.


           이후 산보연의 집단역학조사는 반도체 산업과 질병 간 인과관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고, 인바이런을 통한 삼성의 자체 조사에서도 산업 현장에서 파악된 위험성이 없음이 밝혀졌다. 반올림은 현재 환경으로 과거 위험성을 판단한 것, 나아가 인바이런이 분석한 데이터마저 삼성과 산보연이 제출한 자료가 출처임을 지적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통계적 유의성보다 역학적 유의성이 더 중요”함을 직접 증명하고자 전문가들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었다.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공동교육 및 대응 절차의 체계화를 위해 ‘전자산업노동자건강연구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논문 리뷰, 역학조사 재분석,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의 논문 게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이는 결국 행정 소송에서의 일부 승소와 산재 승인 등으로 이어졌다.


           삼성 백혈병에 관한 지식의 경합 과정에서 노동자와 대항 전문가들은 삼성과 정부의 ‘관리 중심 과학’을 비판한다. 그들의 과학에는 실제 사용되고 있던 유해 물질, 간헐적 누출 사고 등을 경험한 노동자의 몸을 배제했기에 현장성이 결여되어있고, 과학적 조사는 성의 없는 형식적 접근에 불과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이 행하는 과학에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정부는 기업의 이미지나 경제적 효과를 간접적으로 고려했고, 삼성은 미국에서 ‘고용 과학’의 참여자로 지적된 인바이런을 통해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 나아가 그들의 과학은 통계적 접근에만 의존하고, 유해 물질 노출 기준 등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례를 고려하는 데 실패하는 등 과학의 한계에 대한 무지를 보였다. 즉, 실제 경험과 장소성을 고려하지 않고 객관과 중립을 표방하느라 탈맥락적 결론을 내는데 그친 것이다.


           반면 노동자-대항 전문가가 구성한 과학은 ‘현장 중심 과학’이었다. 이들은 경합을 통해 지역적 지식을 구성하고자 했다. 지역적 지식은 특정한 장소, 문화, 공동체에 위치 지워져 있는 내러티브, 도구, 그리고 실천의 집합으로서의 지식이며, 구체적 상황에서 형성된 일반인들의 집단적 경험을 강조한다. 또한, 이들의 과학은 절박한 과학과 사려 깊은 과학의 만남으로, 생생하며 육체성이 배어있고, 사회정의를 도모하는 절박한 과학과, 과학은 약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태도를 지니고 삶과 앎을 연결하려는 사려 깊은 과학이 결합한 형태였다. 나아가 전문성의 확장 요구하는 과학이기도 했다. 반올림 관계자들은 노동자-환자의 생생한 증언이 없었다면 전문가들도 직업병으로서의 백혈병 구성에 실패했을 것임을 강조하며, 시민과 노동자 역시 현장에 관한 한 전문가이므로 이들이 과학 지식 구성에 참여할 때 비로소 맥락적이며 실제적인 과학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논문이 게재된 2013년 이후 5년 만인 2018년 11월 23일, 삼성전자의 공식사과와 중재판정 이행 합의 협약이 이뤄졌다. 그 진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형식적으로 삼성은 책임을 인정했다. 사건의 공론화 이후 삼성이 발뺌하는 대신 피해자-반올림과의 조정을 시작한 데에는 행정법원에서의 승소와 산재 승인이 있었다. 그리고 행정법원에서의 승소와 산재 승인은 삼성백혈병 지식 구성의 경합 가운데 노동자-반올림의 현장중심과학이 승리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법률 상 <질병의 판정> 근거가 되는 ‘상당인과관계의 입증’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인지, 또한 관리중심과학과 현장중심과학 중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만약 관리중심과학이 더 ‘과학적’이라면, 법과 제도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향으로 과학을 ‘비틀어서’ 사용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또 다른 의문이 남는다. 반올림 활동 초기, ‘같은 생산 라인에서 백혈병 환자가 여럿 나왔다는 사실 자체’로는 산재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질병을 경험했으며 실재하는 ‘몸‘은 그 자체만으로는 과학적 증거나 대항 권위로 작용할 수 없는 것일까? 절박한 과학은 사려 깊은 과학의 번역 없이는 과학으로 거듭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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