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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Oct 04. 2020

경계인과 표준

세상을 네트워크로 바라보기



* <과학기술학의 이해> 수업 제출용 에세이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교재 6,7,9장)



이 세상에는 주변인, 혹은 경계인들이 참 많다. 이들은 여러 필드의 경계를 넘나들며 각 필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종종 놀라우리 만큼 창의적인 성과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생리학과 출신으로서 실험심리학을 제창한 빌헬름 분트나, 이론물리학자로서 물리학적 사고를 토대로 ‘정보 유전자 이론’을 구상한 에르빈 슈뢰딩거, 브라질로 피신 후 주류 과학자와의 교류가 줄어들자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데이비드 봄, 역학, 전자기학, 열역학의 경계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 아인슈타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관련하여 드는 질문은, 경계인들이 어떻게 각 필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얻어냈냐는 점이다. 아주 특이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경계인들은 대부분 고립된 상태로부터 오는 무력감 그 이상은 경험하지 못하지 않는가?


이때 인간만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사회나 세계관, 이해관계의 경계에 있는 사물 또한 ‘경계물’로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왔다. 캘리포니아 생물학자 조지프 그리넬과 ‘척추동물 박물관’ 사례를 보면, 그는 동식물 표본과 캘리포니아 주라는 경계물을 통해 상충할 뻔했던 사냥꾼과 학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했다. 캘리포니아 주라는 추상적 개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경계물이 반드시 물질일 필요는 없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이란 서로 다른 네트워크들이 마주하고 있는, 혹은 공동으로 관심 갖는 경계물을 찾아내어 각 네트워크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네트워크 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소통방법에 해당한다. 이때 경계물을 잘 설정하기 위한 전략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여러 네트워크들이 공동으로 관심 갖는 경계물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과 같은 경직된 대응보다 효과적인가? 교육에서 동기가 가장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일까? 나아가 경계물 활용의 실패 사례는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싶어 졌다.


경계물과 경계인처럼 여러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는 또 다른 존재로는 ‘표준’이 있다. 특정 과학 네트워크가 보편적(universal)이기 위해서는 우선 그 과학을 뒷받침해줄 표준이 널리 공유되고 있어야 한다. 표준은 어떤 현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즉, ‘의무통과지점’으로, 표준을 장악하는 건 곧 권력을 쥐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인지했던 강국들은 몇 세기 전부터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해왔다. 예컨대 프랑스는 18세기에 몇십여 년에 걸쳐 도량형 개량을 시도했다. 파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출발했던 탐사팀의 노력, 과학 아카데미의 지지, 도량형 개량에 투자된 거대한 금액 등을 종합하여 프랑스는 1799년 적도에서 북극까지 지구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이라고 생각되는 길이로 만들어진 백금자가 1미터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가 제시한 표준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자연’에서 얻어진 합리적 결과라며 신뢰했다. 그러나 이때 기준이 된 자오선은 사실 프랑스 지역에 국한된 최대 자오선이었다.


표준의 보편성은 과학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특징이 아니다. 앞 문단에 제시된 프랑스의 도량형 개혁 시도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표준의 보편성은 긴 시간과 그동안 투자된 예산, 전문가들의 합의 등이 종합되어 구성된 권위에 기반한 보편성이다. 또한, 이러한 보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표준이 의무통과지점으로서 역할을 잘하도록 조정하고 개선하는 별도의 관리 장치가 필요하다. “보편성은 과학의 성공 원인이 아니라 성공결과”였던 것이다. 절대 진리로서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보니, 과학과 철학 이론 모두 문화적, 경제적 경계 등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결을 같이 하는지 궁금해졌다.


지난 학기 럿거스 대학교에서 형이상학 수업을 들을 당시, 교수님께서는 물리학 및 뇌 과학 연구 결과가 혼재된 여러 유명 논증을 설명해 주셨다. 예컨대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뇌에서 특정 전기 신호가 먼저 발견된다는 실험 결과가 포함되어 있었고, 시간 여행과 관련한 논증에는 상대성 이론이 사용되었다. 논증하고자 하는 주제들이 워낙 물리적으로 증명이 어려운 것이어서 그랬는지, 이 과정에서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없었다. 속된 말로 철학자들의 ‘뇌피셜’보다 과학적 증거가 우세하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자신이 속한 세계, 나아가 전 세계를 설득해야 보편성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과 관련된 논박이 압도적으로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을 통한 과학이론의 물화가 과학을 다시 진리로 위치시키는 것일까?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이론이나 성과가 일정 수준의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 네트워크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때 네트워크는 국지적이다. 고정된 규격과 표준 없이 만들어낸 부시 펌프가 짐바브웨에서 성공적으로 전파된 점이나 다윈이 출판한 진화론의 수용 정도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나 지역이 기존에 갖고 있는 네트워크에 대한 민감성을 길러야 한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을 사물 안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은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인공물, 추상적 개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체성도 우리가 맺는 관계에 따라 역동적으로 바뀌곤 한다. 자전거의 일상화와 함께 여성의 해방이 일부 시작되었고, 해방과 관련한 여성의 ”네트워크가 확장되면서 더 공고해”졌다. (이때, 네트워크의 확장과 네트워크의 공고화는 항상 정적 상관관계를 갖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 질문을 차치하고라도 “여성은 여성이 맺는 관계에 따라서 바[뀐]”다는 문장에서 기술과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애플 워치’, ‘아디다스 트레이닝복’과 맺은 관계, 내가 ‘아령’과 맺은 관계 등은 실제로 나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편집해 나가고 있다.


네트워크에 집중하며 한 인간을 그 사람이 사는 동안 맺어온 관계의 총체로서 바라보는 경우, 나와 타인의 차이를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동시에 교육학과 학생으로서 학교가 얼마나 탈맥락적 공간이었는지를 반추하게 되었다. 부모, 주거지, 등굣길, 친척, 용돈, 가방, 옷, 학원 등 수많은 관계들이 아이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학교는 아이들 각각이 맺은 네트워크를 고려하기엔 시간도 예산도 없다. 천편일률적인 수업이 진행되고, 시험에 기초한 상대평가로 성적을 내는 과정에서 학생들 각자의 정합성은 힘을 잃는다. 한 인간, 또는 사물이 맺고 있는 네트워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비단 과학뿐만 아니라 그 어디서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짙어져만 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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