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의자 없는 노동자들'
'의자' 없는 시대에 살아간다는 것
2012년, 작가 공지영은 『의자놀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한 명씩 의자가 빠지는 게임처럼, 정리해고 앞에 선 노동자들의 불안과 고통을 그려낸 이 소설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에서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의 기억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입사 2년 차 정규직 사원이었다.
회사는 일을 그대로 하면서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하라는 제안 아닌 압박을 가해왔다.
"그 배경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고액 연봉을 받는 고문 한 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입사원 여덟 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고문의 1년 연봉은 신입 여덟 명의 연봉을 합친 금액에 달한다고 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커다란 고문실에서 내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시고 철강신문을 뒤적이며, 가끔씩 드나드는 부서 임원들과 바둑을 두고 오후 4시쯤 자리를 뜨는 일이 전부였다."
그 소문들은 내게 불안과 분노를 안겼고, 무엇보다 내가 믿고 있던 '의자'조차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이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그때 나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의자'를 지킨다는 것, 다시 말해 내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비록 그 결정이 가져올 경제적 어려움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때의 나는 20대 초반 특유의 거침없는 기세와, 지를 줄 아는 용기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몇몇 동료들은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의자를 지켰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경제적 어려움과 일자리 찾기의 고통이 예상을 넘어 깊어지는 일이었지만, 내가 내린 결정은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의자'라는 상징적인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의자'는 단순히 앉을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안정적인 삶을 위한 상징이었고, 갑자기 그 자리가 사라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고 취약해지는지를 실감했다. "이 경험은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의자'를 둘러싼 문제는 그 이후로 내 삶에서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지만, 노동자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의 일터에는 아예 처음부터 '의자'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는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을 기리는 이날, 한국에서는 '근로자의 날'로 부르며 법정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모두가 쉴 수 있는 날은 아니다.
특히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이날조차 제대로 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절과 근로자의 날, 무엇이 다른가
노동절(International Workers' Day)은 1886년 미국 시카고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벌어진 '헤이마켓 사건'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전 세계 노동자들은 이 날을 '투쟁의 날'로 기념하며, 노동권 향상과 사회적 연대를 다짐한다.
반면 한국의 '근로자의 날'은 1958년 정부 주도로 제정된 날이다.
'근로'라는 용어에는 국가와 사용자 입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녹아 있다.
'노동'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라면, '근로'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언어의 차이만큼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절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다.
『의자놀이』 속 노동자들, 오늘의 현실
『의자놀이』의 주인공들은 대기업 정규직이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라는 이름 아래 언제든 내몰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한다.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인간성은 무너지고 삶은 피폐해진다.
오늘날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들은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정규직과 달리 기본적인 고용안정성, 사회보험,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한다.
플랫폼 기업들은 "개인사업자"라는 이름 아래 이들에게 모든 위험과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
언제든 계약을 끊을 수 있고, 사고가 나도 보호받기 어렵다.
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실험
이러한 현실에 맞서, 플랫폼 노동자들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2019년 라이더유니온이 설립되었다.
라이더유니온은 배달 라이더들의 노동권 보호, 배달료 현실화, 산재보험 적용 등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2021년부터는 서울시와 협력하여 배달 노동자 산재보험 지원 사업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또 다른 조직으로는 전국배달노동조합(배달노조)이 있다.
이들은 플랫폼 기업의 일방적인 배달료 하락에 맞서 투쟁하고, 라이더들의 안전과 생계를 위한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일고 있다.
프랑스의 CoopCycle은 배달 노동자들이 직접 조합을 결성해 운영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벨기에의 Smart 협동조합은 프리랜서, 임시직, 창작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고용계약, 사회보험 제공 등 안정적 노동 환경을 지원한다.
이러한 모델은 플랫폼 노동자가 사용자에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돌봄노동자, 문화예술노동자… 노동의 얼굴은 다양하다
비단 플랫폼 노동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인요양, 아이돌봄, 장애인 활동지원 등 돌봄 분야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감내하면서도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문화예술노동자들 역시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계약서도 없이 일하고, 공연 취소나 프로젝트 실패의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은 모두 '노동'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 노동법 체계에서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제도권 밖에서도 펼쳐지는 연대와 협력
(사진제공:라이더유니온 경기지부)라이더유니온 경기지부 라이더나눔봉사단, 첫 배달나눔 활동 진행 글로벌뉴스통신GNA
하지만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모두 소외되고 끝없이 단절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스스로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상호 협력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라이더 유니온(라눔봉사단)과 배달노조는 서울시와 협력하여 취약계층에게 식사를 배달하는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연대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노동자들이 단순히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나아가는 사회적 주체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노동사회
『의자놀이』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독자를 밀어붙인다.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우리는 함께 나아갈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오늘날 우리는 답을 찾기 시작했다.
라이더유니온, 민주노총 산하 배달노조, 서비스연맹, 다양한 협동조합들은 소외된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며 권리를 찾기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아직 주류 사회 속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
정부와 기업, 사회 전체가 이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노동권의 사각지대는 계속해서 넓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은 생계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문제다.
어떤 형태로 일하든,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