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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밤 산책

연기가 멈춘 날

며칠 만인지.


며칠 전 영화 처럼 새벽 몇 시간을 쳐대던 번개 끝은 캘리포니아 역사상 세번째로 큰 산불을 만들어 냈고 내가 사는 동네는 큰 불들 가운데 있어서 며칠을 가득찬 연기 때문에 고생을 했다  


저녁만 되면 연기가 낮게 깔려 창문 열기도 겁났던 날들이 계속이었는데 어제 모처럼 저녁 바람이  상쾌해지고 공기 질도 좋아져서  늦은 저녁 부지런히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내친김에 청소도 해놓고는 미드나잇 산책 겸 운동을 나갔다.

시원한 밤공기.
맨 팔에 부딪치는 서늘한 바람.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다른 날보다 훨씬 더 오래 걸었다.
내일은 또 못 나올지도 모르니 오늘 부지런히 걸어 두자... 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나름 만들어 두었던 루틴이 산불로 인해 깨져서 속상했었는데 쿼런틴 속 일상으로 잠시라도 돌아와 행복하게 밤 산책을 마쳤다.

이 작은 회귀도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하니 코로나가 종식되고 그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

새로운 수요일 아침.
우리 집 고등학생 시니어가 개학을 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 궁둥이를 두드려 깨워주고 아침도 차려 먹였다.
시간이 돼서 아이는 등교하러 방으로 올라갔고 12학년 수험생 엄마의 새 하루가 시작됐다.

공기는 여전히 좋아서 또 오랜만에 창문을 다 열고 아침 환기를 시키며 혼자 콧노래를 흥얼흥얼.

언제 다시 연기가 몰려올지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 공기가 완벽하게 깨끗하고 상쾌한 건 아니지만 (평상시에 비해 대기질은 좋지 못하다. 화재는 진행 중이기에)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온라인 이긴 하지만 아이가 개학을 하고 수업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쿼런틴 생활이 반년 가까이 되면서 돌아가고 싶은 일상의 모습이 내 기억에 의한 건지 아니면 기대에 의한 건지도 헛갈린다.

갈망하는 이전의 일상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꽤 오래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할 수도 있고 지금의 생활이 결국 ‘일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 두려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간 ‘일상’을 그리워하고 그때가 다시 오기를 부질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지금의 매 순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게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겠는가.

창문을 열 수 있는 오늘 아침이 감사하고 식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등교를 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감사하고 
며칠 만에 청소를 해서 깨끗한 집이 감사하다.  

화재 연기 때문인지 아침마다 지저귀던 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새소리가 돌아오면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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