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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효주 Mar 10. 2022

제20대 대선과 2년 전 단상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치뤄졌고, 그 결과가 나왔다. 이 순간 2020년 1월에 썼던 아래 글을 소환해본다. 어떠한 실천적 제안 없이 소회를 늘어놓는 어쩌면 나이브한 문장들일 수 있겠다. 나이브한 꿈을 꾸며 2년이 지나는 동안 사회를 가르고 지배하는 기제는 더욱 강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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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참 낭만적이네요.” “넌 너무 이상주의자야.” 툭 내뱉는 지인들의 한 마디가 다소간 아프게 느껴지곤 했다. 마치 이 신자유주의 사회에 선뜻 제시할 수 있는 나의 경쟁력이란 부재하는 것 같았다. 사회의 요구에 착실히 부응해 나가는 그들에 비하여 나는 도태된 사람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이 왜 단순한 낭만이나 이상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뭐 그렇게 거창한 꿈을 꾼다고. 이 고민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다음의 화두에 봉착한다. 어떤 인간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험악한 사회에 나의 연약한 자아를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 추구해야 하는 것보다 배격해야 마땅한 것을 정하는 게 빨랐다. 혐오를 동력으로 삼는 인간은 되지 말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 특히나 한국 사회는 정량적 지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나라다. 이 지표의 안위가 무사히 보장되기 위해서 기준은 더 강화되며, 강화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개체는 낙오한다. 자본은 지표를 더 단단하게 담금질하고 불가역한 것으로 만든다. 정상과 비정상, 정합과 이탈,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강화되고, 여기에서 혐오가 발생한다.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 혐오로 돌아가고 있는 판국이다.

  요 몇 년 이 땅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여성 혐오를 필두로 하여,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외국인 혐오, 난민 혐오 등 그 모델도 다종다양하다. 개인은 혐오를 벗 삼아 생존의 지름길을 모색하고, 사회는 테제를 더욱 강력하게 작동시켜 정치의 든든한 자산으로 삼는다. 혐오는 사회의 지표나 기준과 든든히 결합한 집단 혹은 개인과 꽤 좋은 궁합을 보인다. 이를테면 중산층의 건장한 이성애자 남성은 종종 혐오 이행의 주체로 부름 받고는 한다. 물론 혐오는 배제를 통한 체제 유지와 지속에 관심을 둔 모든 이에게 기생한다. 혐오와 배제를 통한 기득권 유지가 증거되면, 이 기제에는 더욱 힘이 실린다. 분명,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는 톡톡한 효과를 보고 있다.

  혐오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이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혐오가 만들어내는 병폐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라고 외쳐볼까. 사실이다. 여성, 장애인, 난민을 약자 혹은 이방인의 지위에 박제시키고 배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남성, 비장애인, 내국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다 많은 구성원들에게 권리와 혜택이 보장되었을 때 집단 이익은 커질 것이며, 이는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복지로 돌아올 것이다. 여성, 장애인, 난민에게 이로운 것은 모든 이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낙관적인 표현 역시 덧붙여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혐오를 멈추어야 한다. 혐오 정치가 비상식이 되는 데 다수의 시민이 합의해야 한다. 이는 각 개인의 개별적 특성과 고유성이 지표화되는 기제의 정치적인 올바름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의 인간을 이루는 개별 요소가 곧 그의 정체성이나 대표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사회의 도래를 고대한다. 예의 꿈에 엄청난 낭만과 이상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꾼다. 굳이 낭만적인 표현을 써보자면, 사랑과 연대가 구성원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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