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열아홉. 시간을 보내다

시간은 흘려보내는 것

by 선량한해달

「시간을 들이시나요? 아니면 보내시나요?」


나는 승무원 시절 홍차에 푹 빠져있었다.

'다음 비행에는 루피시아 가향티와 포트넘앤메이슨 아쌈.

이 달에는 비행이 많으니까 인퓨저도 새로 장만해야지.'

모든 비행이 차와 다기와 설렘이었다.


한국은 고유의 차 문화가 있는 나라임에도

유독 홍차는 번성하지 않았는데


작은 잎을 신선한 상태로 볶거나 말려 음용하는 녹차와

어마어마한 속도로 전국을 재패한 커피가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비행 중에도 한국 손님이 홍차를 찾으시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커피와 녹차에 비중을 두고 서비스한다.


얼마 전 녹차전문점에서 세작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신선하고 깔끔한 맛에 감동해 찻잎에 대해 여쭤보니

작은 잎 종자의 어린 잎을 솥에 볶아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을 초청식이라고 하는데

한국 찻잎의 일반적 제조법이다.


한국은 이렇게 고품질의 녹차를 갖고 있어서

홍차를 선호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홍차는 녹차와 달리 발효를 거친 찻잎을 쓰는데

이 발효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차의 맛을 결정짓는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의 비중이

발효 과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비중이 커지면 맛과 색을 잃게 된다.


홍차의 맛과 색은 발효라는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발효를 거친 찻잎을

즐기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


좋은 물과 다기를 사용해야 그 향과 맛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찻잎을 우려내는 순간부터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들이는' 것이 아닌 '보내는' 것으로 전환된다.

그게 내가 차를 즐기는 이유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차도 시간을 들이는 과정과

보내는 과정이 모두 필요하다.


나는 잘 발효된 찻잎을 연수에 우려내는 것을 좋아한다.

티백이나 일회용 거름망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트레이너와 인퓨저를 사용한다.

인퓨저를 선호하지만 관리하기에는 스트레이너가

조금 더 편해서 항상 고민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잔과 포트다.


잔의 모양새와 두께가 중요함은 이 세상 모든

음용류에 해당하는 이야기라 두말할나위가 없지만

홍차에서 유독 의미를 가지는 것이 바로 포트인데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차의 온도를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홍차는 지나친 고온에서는 제 맛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 끓인 물을 식혀서 사용하거나 끓기 직전의

90도 전후의 물을 사용한다.


문제는 물의 온도가 70도 밑으로 떨어져도

그 맛과 향을 잃는다는 것이다.


차를 우려내고 나서 인퓨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온도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께감 있는 포트가

중요하며 워머를 사용해 차의 온도를 유지하기도 한다.


글로 쓰면 복잡하기 그지없는 과정이지만

실제로 홍차를 앞에 두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과정은

무척 정적이고 여유로우며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나는 홍차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실감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해드릴 수 있었고,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친구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매일 힘듦과 마주하는 예민한 나를 안아줄 수 있었다.


오늘도 홍차를 앞에 두고 인생에 시간을 '들이는' 과정과

'보내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본다.


이제는 몇몇 명 홍차 브랜드가 한국에도 있으니

매장에 한 번 나가봐야겠다.

새 인퓨저를 장만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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