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당신의 물레방아
모년 모월 모일
남자사람은 06시의 사무실에서 눈을 떴다. 유일하게 창을 열 수 있는 소회의실 뒤 창고. 온 세상이 담긴 가지각색의 박스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방. 내성발톱 탓에 곪아 터진 오른쪽 엄지발가락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든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세상이 어둡다.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떠지지 않는 눈을 치켜뜨며 쳐진 몸을 반쯤 일으킨다. 사막에 뿌리 박힌 해바라기인 양 불충분한 태양광선을 갈구하며 상반신을 창으로 창으로 밀친다. 겨우 관자놀이가 창틀에 닿았다. 안 감은 머리로 손잡이를 밀어 올려 창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갈증이 물러난다. 간이침대 오른쪽, 험한 발을 겨우 피한 모서리 끝에 반투명한 새끼 거미 한 마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이 가치 없는 발 때문에... .' 남자사람은 작은 거미가 꽤 귀엽다. 오늘도 연기 자욱한 폐가 목구멍을 친다. 하루의 시작이다.
여자사람은 07시의 사무실이 좋다. 텅 빈 지하철도, 적당히 차가운 도시의 공기도, 커피집을 지날 때 맡을 수 있는 커피콩의 향도, 아무도 없는 사무실 문의 깔끔한 열림도, 경쾌한 조명 스위치음도, 드럭스토어에서 나눠준 시향지의 잔향이 감도는 내 데스크도. 아무도 없는 07시의 사무실은 완벽하다. 새로 산 원두를 그라인더에 털어 넣는다. 큰 맘먹고 산 그라인더의 로맨틱한 굉음을 들으며 필터의 두 면을 곱게 접어 드리퍼에 걸친다. 따뜻한 물을 살짝 두르고 잘 갈린 원두를 곱게 쏟는다. 포트의 기분 좋은 스팀이 가습을 시작하면 한 바퀴 능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빵을 만들어둔다. 모든 생각을 접고 몽골몽골 피어오르는 커피빵에 집중하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드립. 한 번 더. 완벽한 내 취향의 커피와 커피향이 공기를 물들인다. 하루의 시작이다.
또 다른 남자사람은 08시에 환복을 한다. 언제나 이 즈음이면 손끝의 감각이 둔하다. 눈꺼풀은 무거운데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몸이 부어있다. 단정한 출근룩을 갖추어 입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기어코 아래로 아래로 투쟁하듯 나아가 본다. 잠도, 밥도, 옷차림도, 출퇴근도. 역행이 익숙한 이 남자사람의 검정 후드티는 삐딱하게 맨 검정 크로스백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역행은 고통스럽지만 결과는 달콤하다. 남자사람에게는 출퇴근 러시도, 야근 스트레스도, 팀워크도, 회식도 없다. 강남에서 서쪽으로. 세차게 역행하는 고요한 지하철에서 곤히 잠에 빠져든다. 자유다. 내 시간이다. 하루의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