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누군가에겐 시작이었다
2019년 10월 20일
'드르륵'
'드륵, 드륵,드르륵'
견본주택에서나 볼법한 깔끔한 침실2. 그 방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한 사람이 애타게 시리를 찾으며 침대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핸드폰 발굴을 시도한다. 그는 이 날을 기다렸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도 모든 신경은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지금 그에겐 몬스터 사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아씨, 얻다 둔 거야. 엄마! 내 폰!"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와 거의 동시에 그의 손이 뭉쳐진 이불 속을 훑는다. 지나치게 깔끔한 방과 대조적인 이불더미 속에서 손끝이 마법을 부린다. 국보라도 발견할 듯한 손놀림이다. 팬티 한 장을 걸친 무방비한 기사의 손 끝에 최첨단 통신 장비의 한쪽 모서리가 걸리는 순간, 안면 인식과 동시에 황홀한 메시지가 눈에 든다.
'[Web발신]
축하드립니다. 귀하는 액세스공사 2019년도 하반기 신입사원 채......'
"왜? 무슨 일이니?"
허겁지겁 달려온 어머니의 주름진 눈에서 걱정과 두려움, 약간의 짜증이 엿보인다.
"엄마, 나 붙었대."
핸드폰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어머니를 부둥켜안는다.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이 실감 난다. 지난 2년 간의 취준 생활은 그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5급 고시를 준비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준비했던 5급 고시는 말 그대로 고시였다. 무리였다. 목적 없이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이듬해 7급 공무원을 준비할 때는 진심이었다. 그는 국제법을 공부했던 적이 있었고, 외교와 국제 무역 분야에 큰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외무영사 직렬 정원에는 들지 못했다.
그는 공기업으로 눈을 돌렸다. 괜찮다는 메인 공기업을 모두 골라내 서류 가산점 요소를 추려냈다. 가산점 챙기기로 반년을 소모하고 얼추 서류 합격권에 들 무렵, 열 과목으로 이루어진 NCS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썩어도 명문대생이라고 국영수가 출중한 덕에 빠른 준비가 가능했지만 문제는 전공과목이었다. 경영, 행정, 경제, 법. 각 과목의 각론까지 파고드니 또 반년이 지나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했음에도 시험장에서는 처음 접하는 형식의 문제가 나오기 일쑤였다. 공무원 시험이 지엽적인 문제로 애간장을 태웠다면, 공기업 시험은 기업 특성이 두드러지는 문제가 대뜸 튀어나와 뒤통수를 치곤 했다. 연이은 불합격으로 오갈 데 없이 산산조각 난 자존감이 찾아낸 곳은 생긴 지 4년 된 작은 공기업이었다. 메인 공기업들의 하반기 채용이 끝난 와중에 단 하나, 그곳의 채용만이 마감 전이었던 것이다. 홀린 듯이 알리오 공시를 살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성실히 공시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기타공공기관이었다가 올해 처음 준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된 탓에 몰랐던 것이다. 그는 보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낮춘 눈이다, 한 번 더 낮추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 한 켠에 억울함과 많은 응어리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 됐다. 이제 폐인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중학생 때도 하지 않던 게임에 빠질 필요도, 죄 없는 어머니께 짜증을 부릴 필요도 없다. 찬찬히 메시지를 읽어 내려간다. 신체검사일은 10월 20일. 선릉역. 2년 만에 그에게도 중요한 일정이 생겼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는 5초가량 합격 메시지를 읽고 루틴을 수정했다. '신체검사면 아침은 못 먹겠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쪽은 전자에 비하면 담담했다. 글자 수가 많은 것도 아닌데 '신입사원 채'에서 첫 번째 메시지가 끝나고 '용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로 애매하게 시작하는 두 번째 메시지가 온 것이 영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도.
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맑음
<신입1> 신체검사일
출근 시간을 피하기 위해 오전 7시에 출발해 건진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신체검사를 받았다. 인국공이나 한수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직장이면 부모님 면도 세워드릴 수 있고 그럭저럭 용납 가능한 범위의 직장이다. 적어도 짤리지는 않을 테고, 배경 때문에 여자한테 차이는 일은 없을 테니. 대학도 직장도 한 번에 붙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근성 하나는 있는 놈! 이제 나도 공기업인이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어머니를 모시고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늦어도 9시 반에는 신체검사가 끝날 테니 약속 시간은 9시 20분으로 잡았다. 출근하는 직장인들 틈에서 초라하게 빛나는 엄마 손을 잡고 운동 삼아 이십여분을 걸었다. 아침 공기가 맑았다. 바보스럽게도 백화점에 도착해서야 오픈 시간이 10시 반임을 깨달았다. 50분 정도 기다리니 문이 열렸다. 평일 오전의 백화점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어색한 걸음걸이로 두리번거리며 1층을 빠르게 벗어났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백화점 1층이 싫다. 참 견디기 힘든 곳이다. 가죽 냄새와 진한 향수 냄새가 섞여 묘한 향취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미소까지 찍어 바른 듯한 판매원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곧장 중앙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꾸물꾸물 엄마의 느린 걸음걸이가 유독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이 곳에 아내 선물을 사러 오는 날도 있겠지.'
4층으로 올라가 출근날 입을 정장 한 벌을 샀다. 이틀 전부터 검색해둬서 사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새 옷을 받아 들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굳이 계산하겠다는 엄마 때문에 엄마 카드로 결제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왜 남자 옷은 이렇게 비싼 걸까? 그렇다고 싸게 파는 옷가게들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냥 온라인으로 살 걸 그랬다. 후회에 휩싸여 곧장 식당가로 올라가 예약한 냉면집에 들어갔다. 사실 오늘 백화점에 간 이유는 엄마가 좋아하시는 냉면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2년 간 나 때문에 고생하신 우리 엄마, 이제 효도할게요. 걱정마요. 좀처럼 드시질 못하는 엄마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어딘가 어둡고 슬픈 저 표정이 내 뒷바라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열심히, 무조건 열심히 할 거다. 남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살 거다. 용돈 두둑히 드리는 자식이 될 거다. 제일 먼저 승진할 거다. 제일 오래 다닐 거다. 돈 모아서 차도 사고, 여자 친구도 만들고, 결혼도 하고, 주니어도 낳고, 집도 사고. 효도할 거다. 효도는 미루면 안 된다고 한다. 그게 오늘 만두를 추가한 이유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지금 하자. 엄마, 사랑해.
<신입2> 아마도 마지막 루틴
0800-0900 아침, 분리수거, 피아노
0900-1000 적금(선납이연6개월차납입)&청약홈체크
1000-1200 신체검사(→아점), PT
1200-1400 점심, 인강
1400-1500 자습
1500-1700 낮잠
1700-1800 저녁, 베이킹
1800~ 휴식, 만화책읽기, 리보트릴1정,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