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리님 택배요."
"네?"
"전략처 송보강이래요. 부피가 크길래 들고 왔어요. 그런데 가볍네요?"
"어우,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가져다주시고. 이번 사록에 들어갈 비전 디자인 샘플인가 봐요."
"아이고, 고생하시네. 전략도 별 걸 다하네. 보면 맨날 바빠."
"그렇죠, 뭐. 항상 감사합니다."
정대리는 저렇게 싹싹하고 배려심 있는 이대리가 우리 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적성에도 안 맞는 영업에 틀어박혀서 욕먹으면서 일하고 있는 걸까, 문과라던데 오히려 전략에 맞는 사람 아닐까. 그러다가 나 역시 같은 처지라는 현실을 깨닫고 이내 허튼 생각을 거뒀다. 이 험한 동네에서 욕먹는 건 나 하나면 족하다. 대리 하나 더 와봤자 욕받이가 하나 더 늘 뿐이다.
난데없이 겉보기 번지르한 사록을 제작하라는 명령에 두 달 밤낮을 고민한 정대리였다. '난 사업면허 담당인데 왜...' 억울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다. 정대리는 시간이 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빨리 쳐내야 진짜 '내 일'을 할 수 있다. 금요일에는 회의 자료가 끼어들 게 뻔하다. 사록의 완료일은 목요일 오후여야만 한다. 드물게 예정된 타이밍에 딱 맞게 택배가 도착한 것이다. 정대리는 지난 분기 경영 통계 수집으로 얻은 숫자들과, 각 처에서 혈전을 벌이며 새롭게 얻어온 자료들을 억지로 이해해가며 간결한 활자를 창조해냈다. 그 활자들을 빼곡히 채워 넣은 저주스러운 사록의 끝이 보인다. 이제 위에서 원하시는 '번지르한' 비전 디자인만 갖다 붙이면 볼만한 작품이 하나 나오는 것이다.
'근데 무슨 종이 몇 장이 이렇게 부피가 커?'
정대리는 잘 드는 날선 커터칼을 비스듬히 눕혔다. 세심하게 포장된 택배 상자의 정중앙을 단번에 조심스레 긋는다. ...지익.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각형의 작은 모형 꾸러미가 들어있는 것 같다. 이런 건 주문한 적이 없는데 오배송인가 싶어 급히 두세 겹의 뽁뽁이를 뜯어낸다. '영어?' 정대리는 뽁뽁이 사이로 문자를 감지했다. 작고 귀여운 상자에 선명하게 찍힌 알파벳은 바로,
'Marlboro gold'
2019년 10월 24일 목요일 비
<전략처 정대리> 비도 시원하게 못 내리는 더러운 날
이 따위로 덮어놓고 나간 그놈을 절대 용서 못한다. 박주임의 노트북을 열었을 때 덩그러니 휴지통 하나만 떠 있는 모니터를 보며 3초 정도 몸속의 피가 차가워짐을 느꼈다. 그래, 노트북에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파일링은 해뒀겠지. 열쇠가 없어 수 년째 열지 못하는 캐비닛을 빼고 19층의 모든 캐비닛을 뒤졌지만 파일링은 고사하고 박민혁 이름이 박힌 공문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알아서 검색해라 이거지? 추적추적 비도 더럽게 내리는 날이다. 언젠가 반드시 복수해주리라. 모닝 저주 리스트에 또 한 놈 추가다.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과장님 자리는 또 비어있었다. 오늘 내가 본 과장님의 마지막 모습은 불룩한 셔츠 앞주머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휘저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이었다. 아니, 헐거운 슬리퍼가 걸린 뒷다리 한쪽이었다. 저거 또 담배 피우러 나가지 싶었다. 나도 담배를 배울 걸 그랬나. 담배를 피울 줄 알았으면 따라나가서 뒤통수를 쳐 죽이는 건데.
과장님은 언제나 자리를 비운다. 자리에 있을 때는 게임 아니면 주식이다. 지나면서 언뜻 보기에 과장님이 하는 게임 속 캐릭터들은 자동으로 싸우는 것 같다. 그런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긴장 속에서 전투 장면을 지켜본다. 심히 동그란 안경 사이로 티슈를 넣어 흐르는 땀을 훔치는 모습은 나 혼자 보기 아까운 명장면이다.
처장님은 외부 기관 회의로 일주일째 얼굴도 못 봤다. 같이 일하자며 친히 찾아와 발령 낼 때는 언제고, 일주일에 한 번 보면 다행이다. 도망치는 신입들 때문에 사람이 급했던 것이다. 돌려 막을 어리숙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야 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발령받고 3년이 지났다. 기껏해야 막내 대리인 내가 실무 최전선에 깊숙이도 들어와 있다. 이제 기조실장님도 나에게 다이렉트로 일을 준다. 업무 분장에 들어있지도 않은, 해도 티도 안 나는 짜잘짜잘 귀찮은 일들을. 정년 앞둔 양반 하나 때문에 괜히 감사거리가 늘까 걱정이다.
죽고 싶다. 아니야, 아니다. 이런 생각은 안 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민혁이는 어디까지 하고 간 거지? 애초에 어디부터 맡았던 거지? 분명 과장님이 하던 사업 심의를 이어받았었다.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왜 여기서 이 짓을 3년 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래가 관둘 때 나도 관뒀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러운 꼴 덜 보고 인생 살았을 텐데. 입사 후 1년 간의 현장 생활이 어리고 미숙했던 내게 본사에 대한 로망을 심어줬던 게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그게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어쩌다 내가 7기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인가.
오늘도 머나먼 영업처에서 이대리님이 택배 배달을 왔다. 저 착한 사람은 왜 저러고 사는 걸까 생각했다. 그 택배 상자를 열어보지만 않았어도 오늘 일진이 좀 덜 사나웠을 텐데. 그런데... 원래 담배가 배송이 돼?
<전략처 송과장> 인생이 파란불
비가 내리고오~ 음악이 흐르고오~ 내 마음도, 차트도 파랗게 무너져 내리고오. 아랫것들은 도망가고 윗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마누라는 화만 내고. 사장 놈들은 아주 그냥 줄줄이 잘들 내려오고. 이번엔 장관도 바뀐다고? 뭔 짓들이여. 신임 장관 업무 보고까지 쓰라고 하면 나는 내 인생 언제 살고? 새끼들은 커가는데 이거 하나 더 쓴다고 돈을 더 줘 뭘 더 줘?
그나마 정대리가 버텨줘서 다행이지. 일을 잘 하진 않지만 쓸만한 놈이고. 요즘 정대리 글 써오는 거 보면 곧잘 내 흉내도 내고. 쟤가 언제 저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 나도 그때는 참 열심히 했었는데. 정대리는 그래도 상사 잘 만나서 일을 많이 배우지. 나 때는 진짜 맨땅에 헤딩하고 그랬는데. 비 오니까 박주임이 떠오르는구만. 박민혁이, 그놈이 일은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