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루니안
부부로 가장하기
가위, 바위, 보!
숙소에 있고 싶어 요리팀이 되고 싶었지만 시장팀이 되어 선배들과 나갈 채비를 했다. 본부 지침에 따라 안전하게('대뽀'라고 하는데 택시에 다른 손님을 태우지 않기로 하고 비용을 좀 더 지불하는 방식으로) 택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휴대폰을 샀던 큰 시장으로 간단다. 복잡하고 사람이 정말 많아 조심해야 하는 곳이다. 가방은 무조건 앞으로 메고 지갑, 휴대폰도 내 손에 닿을 위치에 보관해야 한다. 얼마 전에 나도 모르는 사이 배낭 옆주머니가 찢기고 휴대폰을 도난당한 적이 있기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귀중품을 몇 겹 되는 속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6차선 도로를 횡단해서 시장과 연결된 길 안쪽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횡단보도'라는 것도 있지만, 무법천지 이곳에서는 횡단보도 신호를 지키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기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무단횡단 한다. 죽지 말자~!! 소리를 지르며 건너편으로 뛰었다.
고기와 야채, 과일, 주전부리 등을 사야 하는데, 과일, 야채는 마트보다 저렴해서 이곳을 들러 큰 마트에 가기로 했다. 야운데에서는 외국인이 타깃이 되는 강도사건이 잦고 특히 여자는 위험하기 때문에 부부로 가장하고 가야 한다고 주장하던 선배 한 명이 나를 본인의 아내로 지정하면서 동기 A와 다른 선배까지 우리는 부부인척 가장하고 중앙 시장에 갔다.
27세, 아직까지 연애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부부가 어떻게 다니는지 알게 뭐람?
부부니까 둘씩 나란히 걸어야 한다는 둥, 팔짱 끼는 게 좀 그러면 자기 팔꿈치 옷자락이라도 잡으라는 둥 주절주절 행동강령을 읊고 있는 K선배는 평소 말이 없는데 오늘따라 한껏 들떠 보인다. 국내 최고 대학을 졸업하고 7개 국어를 한다는 그는 외관으로 볼 때 심술궂고 독하게 생겼는데,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마음이 여리고 애니메이션 매니아에다 환장할 노릇으로 귀여운 인형 모으기 취미도 있다. 단원들이 모일 때마다 맛있는 한식을 요리하는 자상한 면도 있지만, 담배는 골초, 술은 보리차 마시듯 하는 주당이며 주짓수를 한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 선배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기 J가 있었으니, 그 친구가 시장팀이었어야 하는데... 장 보는 내내 부부라는 이 설정이 불편하고 싫었다.
현지인이 나를 보며 비쥬 하듯 두꺼운 입술을 모아 '쮸압' 하며 인사하고 생선하나 사가라고 내 앞에 생선을 들어 보였다. 선배는 자기가 남편이니 자기한테 말하라며 가로막았다. 현지인은 껄껄 웃으며 자기들끼리 중국인 두 커플(이곳에서 동양인은 일단 중국인으로, 옷을 좀 깔끔하게 입으면 일본인으로 간주)을 분석하듯 속닥거리고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한다. 언어는 안 통해도 신기하게 알아들은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 가득한 그 순간, 선배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정색하며 유창한 불어로 그들에게 말조심하라고 경고하듯 말했다. 프랑스어를 이렇게 잘 말할 줄 몰랐고, 우리가 중국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공손해지는 현지인들의 태도 변화가 궁금했지만 선배가 무슨 말을 들었고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시장 보는 내내 자기 말만 잘 듣고 옆에 붙어있으라며 잔소리가 이어졌기 때문.
여러모로 든든한 선배들이 무거운 짐을 들어줘서 수박과 파인애플 그리고 망고, 튀긴 쁠랑뗑, 감자, 양파, 피망 등을 잔뜩 샀다.
현지인보다 더 위험한 건
아프리카에서 해 먹고 사느라 요리에 재미가 붙은 선배들과 요리팀 동기들이 주방에서 부산을 떨며 장 봐온 재료를 다듬어 준비한다. 카레도 만들고 계란국도 끓이고 김치는 없지만, 마트에서 사 온 피클과 양배추로 만든 샐러드가 아삭아삭 상큼했다. 양파와 피망 그리고 소시지를 볶다가 케첩을 넣어 만든 쏘야볶음이 먹음직스럽다. 이 선배들 바로 앞 기수가 전부 여자선배들이었는데, 이제 곧 2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면 카메룬엔 우리 기수와 남자 선배들만 남는다. 우리가 오기 전에는 여자 선배들이 늘 요리를 해서 해 먹였다고 했다. 그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는 중이라는 선배들의 허세가 그럴듯했다.
얼마 전 쿠데타가 불발한 이곳에 다시 후배들이 들어오기를 그래서 좋은 전통이 이어지길 바라면서 모두 맛있게 먹었다.
먹어도 배고픈 외로운 우리는 밥을 배 터지게 먹고 나서도 과일, 과자, 아이스크림, 빵 등 후식도 거하게 먹는다. 후식을 준비하는 동안 차례로 씻자고 각자 방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하여 석회질이 많이 포함된 여기 수돗물은 음용이 불가하고 누런 빛의 녹물처럼 나오지만, 익숙해져서 그 물로 양치는 물론 머리도 감고 샤워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니 바깥에서 묻혀온 흙먼지, 매연이 깨끗이 씻겨나가는 것 같다.
수건을 머리에 돌돌 말아 올리고 나오는데, 내가 눕는 자리에 K선배가 누워 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끼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선배!!"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뻔했다.
간호 동기 A와 함께 쓰고 있는 이 방은 샤워실이 딸린 큰 방이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오면 바로 침대가 눈앞에 있는 구조였다. '이런 변태 새끼!' 이런 일은 처음이라 너무 당황해서 바퀴벌레와 도마뱀을 본 것처럼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근데 이 양반이 술이 취했는지, 일어나 앉더니 나를 노려본다.
"이 자리 원래 제가 쓰던 자리라서 그리워 누워봤어요." 하며 억울하다는 듯 해명하고는 어슬렁어슬렁 방을 빠져나갔다. 같이 방을 쓰는 동기 A가 내 괴성을 듣고 달려들어와 이 장면을 보더니 박장대소한다. 짧은 숏팬츠에 나시티 하나 입고 머리에선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시퍼렇게 질린 나를 보며 뭘 그렇게까지 놀라냐며 선배가 좋아하는 것 아니냐며 깔깔 웃었다. 당혹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나는 누가 고백한 것도 아닌데 오버하며 선배의 행동에 진절머리를 쳤다. 샤워하는 중인 걸 알면서 방에 와 있었다는 것부터 충격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자리에 눕고 베개 냄새를 맡다니! 우웩.
동기가 샤워하는 동안은 내가 지켜준다는 핑계로 밖에 안 나가고 방에서 머리를 말리며 온갖 추측을 해보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감수성이 풍부하니까 추억의 장소라 자기가 자던 방이 그리워서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굳이 내가 샤워 중인 그때 와서 드러누워 있다니 예의가 없는 사람 같고, 술에 취했으니 그런 건가' 이 생각 저 생각 속 이해하는 쪽으로 애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가 얼굴을 파묻고 있던 베개는 뒤집어 두었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단원들이 모여 앉은 거실로 나갔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분 좋게 한 잔씩 해서 농담이 오고 가고 웃음꽃이 피었다. 아까 밖에서 내 괴성을 들은 몇몇은 방에서 바퀴벌레 나왔냐고 묻는데 그 옆에 앉은 K선배 들으라고 그보다 더한 것이 나왔다고 농담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선배는 아까일이 맘에 걸리는지 자꾸 쳐다보며 미안하다는데, 생각할수록 이상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지인보다 더 위험한 건 선배 너.
다들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우리는 이야기를 안주 삼고 푸짐한 주전부리로 해장과 후식을 시작했다.
현지에서 겪었던 병원이야기, 프랑스어 이야기, 영어 이야기, 집 이야기, 현지인 이야기 그러다가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짝사랑 이야기, 여자친구, 약혼자를 그리워하며 지난 추억이 줄을 잇는 20대 청춘들에게 마무리는 언제나 연애, 그놈의 깔때기 이론.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로 회포를 푸는 우리처럼 숙소 밖에서는 흥겨운 음악에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카메루니안 젊은이 가득한 Pub펍에 불빛이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