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루니안
복지혜택, 공주병
솔직히 처음 한 동안은 내가 진짜 이 정도인가, 개성 있는 이 얼굴이 정녕 아프리칸 스타일인가 했다.
소싯적 매니아 층에서 고백도 제법 받았기 때문에 이놈의 인기가 대륙을 넘고 인종을 넘어 카메룬에서도 통하나보다 했단 말이다.
적도태양볕에 누렇게 탔어도, 현지인 사이에 있으면 Blanche(하얀)인 나는 출퇴근길 매일 놀림당하는데, 길에서 만나는 이들, 오토바이 택시를 타면 쫓아달려 오는 다른 기사들이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며 "정말 이쁘다, Tres belle"를 외친다. 정말 이뻐서라기보다는 놀리기 만만한 여자 외국인이어서라는 걸 잘 알지만,
여기서 들은 '이쁘다'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많을지도 모른다.
흰쌀밥한테도 이쁘다 이쁘다 하면 이쁜 곰팡이를 피운다 하지 않던가?
귀찮긴 하지만, 지겹도록 듣는 이쁘다는 말은 내 어깨에 큰 뽕을 넣어주고 정말 내가 이쁜 줄 알고 많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오늘도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힘과 용기를 주는 게 사실이다.
홀로 멀리까지 와서 고생한다고 응원해 주는 현지인의 메시지.
하지만 갈수록, 이쁘다는 말을 넘어 "결혼하자"하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집 앞까지 쫓아오고, 뭐랄까... '듣자 듣자 하니까 이것들이' 할 만큼 이성을 통째로 빼버린 남자들의 동물적 마음의 소리가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무방비로 노출되는 날이 많아졌다.
이런 일이 출퇴근 길에서 만나는 불특정 타인뿐 아니라 내 일터의 동료들에게서도 거듭된다는 것은 이것이 현지의 뿌리 깊은 관습이고 문화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일부다처제>!!
현지에서 다처는 재력을 상징한다. 부인이 많을수록 부유하다는 증거이며, 그 사람이 능력자라는 뜻이다. 여자들도 가난한 남자의 부인보다는, 재력가의 끄트머리 아내가 되는 것을 원한다는 몇몇 동료들의 말들이 현지의 일부다처제를 실감 나게 한다. 물론 응급실 수간호사나 수술실 수간호처럼 크리스천이거나, 중산층인 사람들은 일부일처가 많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자로서 경제력만 된다면 본심은 첩을 만드는데 진심이었다.
매너 있고 친절한 병원 동료나 상당히 권위가 있는 의사 중에도 좀 친해졌다 싶으면 자기랑 결혼하자고 하는 그 말이 인사말보다 더 흔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랑 결혼하자" "너는 여기서 결혼을 해야 한다."
볼 때마다 말하며 내 반응을 살피는 사람도 있고 자기 재산 및 구체적인 계획까지 이야기하며 진지하게 고백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모두 결혼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 말을 하는 중에도 네 번째 손가락에 꽉 끼여 있는 구리반지가 무색하게 말이다. 그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듣는 사람들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게 참 신기하다. 수술실 간호사 중에 자기를 왕자라고 소개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진짜 왕자였다. 자기 엄마가 왕의 스물일곱 번째 부인이고 자기는 왕자이며 이미 5명의 아내가 있다 했다. 어이없게도 나에게 여섯 번째 부인을 하란다. 일주일 중에 2일을 나에게 할애하겠다 했다(엄청난 혜택을 주는 것처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남자에게 집중적으로 받은 프러포즈는 기록적이긴 하지만, 모두 유부남이며 둘째 부인부터 n번째 부인이 되어달라는 첩 자리 프러포즈였다는 특이사항에 밑줄 쫙.
중환자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외과 의사 1년 차 닥터'꽈쵸'에게 물어봤다. " 카메룬 사람들은 나만 보면 왜 자꾸 결혼하자고 하나요? 이미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면서 왜 그러는 건가요? 여기서는 결혼이 그렇게 쉽나요? 깔깔 웃으며 그가 하는 말이,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만, 카메룬은 일부다처가 합법이야. 어쩌겠어? 여기서는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걸. 그리고 네가 피부색이 하얗기 때문에, 우리랑 섞이면 아이들은 좀 더 밝은 색 피부를 가질 수 있을 거 아니겠어? 돈이 많은 여기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외국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 여자들도 외국인 남자의 첩이 되어 버려지더라도 혼혈아를 낳고 싶어 해. 우리는 피부색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라고 꽤 솔직한 답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현지인들이 결혼하자 하면서 멜랑제(mélanger, 섞다)라 했던 말이 이해가 됐다.
프러포즈받는 나를 보며 질투한 건지 시기한 건지는 몰라도 희던지 검던지 해야지 누런색은 색이 아니라며 황인종을 무시하면서도 내가 바르는 화장품을 달라고 하거나, 직모로 자라는 내 머리카락을 하루종일 만지작하며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일부다처제, 과거로 여행을 온 기분이다.
나는 Monogamy라고 외쳐도 너는 카메룬에 와있기 때문에 Polygamy 해야 한다는 현지인들.
목소리로는 이길 수 없어서 그런 논쟁 자리를 피하면서도 내가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무조건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나도 모르게 이들을 판단하고는 했다. '그러니, 에이즈가 넘쳐나지.' '그렇게 무책임하니까 애와 엄마들이 버려지고 나라가 잘 살 수 있겠어?' 하는 판단들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지난 세월 돌이켜보면 위생과 의료 수준이 열악하여 대를 잇지 못하고 죽는 영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엔 첩이 있어도 모르는 척했던 사회였던 것을 참고할 때 이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지적할 자격은 나에게 없다.
다만, 일부다처로 생기는 여러 건강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될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고, 그 둘의 연관성에 대해 이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90%은 에이즈 환자이고, 엄마 뱃속에서부터 감염된 소아과 아이들도 많은데 말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일개 봉사단원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 현지화되어가고 봉사하는 것이 이들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동안은 결혼하자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하핫'하며 크게 웃거나 무시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지겹기도 하고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몇 가지 스토리를 짰다. 대학입학기념으로 엄마가 사주셨던 빛나는 반지를 가져오길 잘했지, 그 반지가 이렇게 나를 보호해 줄지는 몰랐는데, 18K에 가운데 커다란 큐빅이 유난히 빛나서 결혼반지라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지였다. 사실 너무 반짝이고 화려해서 한국에서는 한 번도 끼고 다닌 적이 없는 반지다.
이제는 누가 결혼하자고 하면 그 반지를 들어 보이며, 살벌한 Monogamy 식 경고를 한다.
"봐라, 난 결혼해서 애가 둘이고, 내 남편이 알면 내일 와서 널 죽일 것이다. 나는 Monogamy란 말이요!!!"
(Mon mari va venir, tu vas mourir)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더니, 동네에 소문이 다 난 것 같다.
스물일곱, 본 적도 없는 남편과 애가 둘인 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