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루니안
뭉게구름과 베니에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내 방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방 한쪽면에 크게 나 있는 창문 가득 뭉실뭉실 흰구름과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어딜 가나 보이는 아프리카의 하늘이지만, 커다란 네모 속에 하얗고 밀도 높은 생크림을 쭈욱 쭈욱 짜놓은 것 같은 구름이 금방 손에 잡힐 것 같은 내 방은 힐링스폿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집 앞 사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 웃음소리, 대화소리, 장사하는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 쌍쌍프랑(Cent franc)~~베니에,바난~~~~" 보통 10대 미만에서 10대 소년,소녀들이 플라스틱 통에 베니에를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사를 한다.
베니에는 테니스공처럼 동글동글하게 밀가루 반죽을 해서 팜유에 튀겨낸 빵인데, 너무 맛있다. 뛰어나가서 몇 개만 사올까? 하아.. 나가면 또 니홍(니 하오 하는 중국인 인사말을 흉내 내어 중국인 놀릴 때 속어처럼 쓰인다)하며 애들이 놀리겠지? 난 또 한국사람이라고 절절하게 설명해야겠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배고픔이 피로감을 이길 때는 고민 없이 사러 나가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루종일 현지인들 사이에서 시달린 내 몸과 정신을 위해 좀 더 누워서 생크림 뭉게구름을 더 봐야겠다.
오토바이 택시 vs 자동차 택시
내가 사는 곳은 바푸삼이라는 도시 중심에 있는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5층짜리 빌딩이다.
1층은 자동차 부품을 파는 상점과 정비소가 함께 있어 거기 일하는 사내들은 내가 오갈때마다 휘파람을 입술 떨어져나가도록 불어댄다. 유독 나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이 동네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고, 매일 외출시 쓰고 다니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썬캡이 신기한 것이다. 종종 내 앞에 와서 손을 휘저어 내가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내 얼굴을 보려고 썬캡 아래로 고개를 쑤욱 내밀어 보곤 한다. 그 순간 휙 썬캡을 열어젖히면 등치 큰 사내가 '오호우~!!!' 하며 놀라 뒷걸음질치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가 있다.
2층부터 3층은 회사 사무실이 몇 개 들어가 있고 4층엔 내가 사는 A호, 앞 집 B호 딱 2개의 거주 가능한오피스텔이 있다. 5층은 이 건물 사장이 사는 것 같다.
집을 나서면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일렬횡대로 서있는 오토바이 택시 기사들이 나를 반긴다.
저 멀리 내가 나오는 것이 보이면 벌써 소리를 치고 그 두꺼운 입술을 둥글게 모아 '스읍~'하는 소리나 '히이이'하는 밀림에서나 들을 것 같은 소리로 호객행위를 한다. 1년 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이래서 차가 있어야 하고, 전용기사가 필요한가보다' 하며 진땀을 흘리며 무조건 택시를 잡아탔다. 하지만, 이곳의 택시는 나 혼자 누릴 수가 없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목마다 타겠다고 손 드는 모든 사람을 태워 가기 때문에 어떨 땐 이게 출근 길인지 스포츠 진기명기 묘기인지 알 수 없게 그 좁은 차에 사람이 계속 쌓이는 걸 참아야 하며, 출근 길에 하루치 에너지를 다 쏟을 수가 있다. 게다가 택시안에 바퀴벌레도 다닌다. 나는 것은 파리요, 기는 것은 바퀴벌레...
매일 겪는 이 상황들에 익숙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일렬횡대 오토바이 기사들에게 당당히 다가가 손가락을 내밀어 젤 깔끔한 오토바이를 선택하여 출근하기 시작했다. 타기 전까지는 '니홍'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징그러운 입술을 내밀어 쭙쭙 소리내며 호객행위 하다가도 내가 선택하면 오히려 쑥쓰러워하는 기사들이 때로 귀엽기도 했다. 속은 시커먼 사내들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타기 전에 택시요금을 협상하는게 너무 재밌다. 보통거리 100프랑, 멀면 200프랑 급할 땐 더 얹어서.
내가 외국인이라고 프랑스어를 읽을 줄 모를 것이라 생각하며 바가지 씌우는 카메루니안아~!
나도 카메루니안이다 이놈들아, Unit cost 다 알거든~!!
"쌍 프랑에 윗동네 시장으로 갑시다."
눈 뜨고 코 베이던 날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네. 감자랑 양파 그리고 망고 좀 사러 가야겠다.
집 옆 작은 시장 말고 오늘은 운동삼아 윗사거리로 가볼까? 핸드폰 하나, 지폐한장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가볍게 집을 나섰다. 붉은 흙 먼지가 여기저기서 날리고 도로는 자동차, 택시, 오토바이,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복잡하다. 커다란 쁠랑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엄마, 엄마 뒤를 따라 열심히 걷는 허옇게 콧물자국 눌러붙은 귀여운 꼬맹이, 나랑 눈이 마주치더니 까만 얼굴에 새하얀 큰 눈이 더 커진다. "살뤼(Salut~!!)" 하고 인사했는데, 애가 금방 울 것 같아서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다시 돌아봤다.
포도송이를 하나 걸어두고 몇 알씩 팔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포도를 구경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반가웠지만, 낱알로 파는 걸 보니 뭔지 모르게 찡하다.
오랫만에 시장에 오니, 사고 싶고 먹고 싶은게 많구나.
바난(바나나), 빠따뜨(감자), 쁠랑뗑(바나나과의 채소), 망고, 오뇽(양파),토마토, 쏘야(고기 꼬치구이),마뇩(떡처럼 쫄깃한 카사바를 찧어만든), 빠빠이(파파야),빠시옹(패션프룻)....
Ça coûte combien?쎄꽁비엥? 싸끄꽁비엥?얼마예요?
C'est trop cher. 너무 비싸다.
Donnez-moi un bon prix. 싸게해줘요옹
최소한 사기는 안 당하게 매일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프랑스어 회화실습의 현장이다.
내 말을 알아듣는 상인들은 박수를 치며, 프랑스어를 하는 나를 보고 지니어스라며 진정성 있게 거래를 한다.
만족스러운 거래에 뿌듯해 하며 양손에 과일, 야채를 사들고 걸어나오는 길이었다.
시장 길목을 빠져나오며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있는데,
'엇!!!!' 하는 순간 왼쪽 바지 주머니에 손이 스윽 들어왔다. 너무 놀라서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한 사내가 내 바지 주머니에서 방금 꺼낸 지폐를 내 앞에서 흔들며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다가 정신이 들어 소리쳤다. "야 이 도둑놈아~~~~~~~~~~~~!!!!!" 급하게 나온 한국어 육두문자에 주변 현지인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들 중에 군인이 있길래, 내가 저 사람이 내 돈을 훔쳐갔다고 도와달라고 설명했다.
내 말을 들어보고 나의 신분을 확인한 군인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Désolé. Nous sommes pauvres. (내가 미안해. 우리는 가난하잖아)."
내가 당한 일을 지켜보면서도 웃고만 있던 현지인들에게 배신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내가 여기와서 의료봉사하고, 베풀어 준 게 얼만데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나를 안 도와준다고?' 하는 생각에 모두가 미웠다.
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소매치기를 두둔할 건 아니지만 자기들이 가난하니 이런 일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현지인들을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나는 내 인생의 일부를 이들과 나누고자 여기에 온 것이다.
인간은 간사해서 순식간에 100원,200원도 손해보지 않으려 현지인보다 더 현지인처럼 살게 되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 나는 눈 뜨고 코 베였다. 그리고 초심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