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겪어야 할 결투

시어머니 vs 며느리

by 아궁이

'어머니, 아들 데려가세요. 저는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아휴, 왜 또 그러니? 오늘 몇 시 퇴근하니? 내가 네 회사 사무실 근처로 가마.'

'늘 그렇죠.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아요.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아니면 퇴근길에 신촌에서 보자.'

'네....,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

이 대화는 내가 처음으로 이혼을 결심했던 어느 날 시어머니께 내던진 결투장이다.


신혼 때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긴장되었다. 어색하긴 했어도 내 부모님께 하던 대로 시부모님께도 전화안부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엔 이렇게 전화 안 해도 된다." 하는 말이 왜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던지 끊을 때는 '다음엔 안 해야지' 했었다. 그러다가도 늘 같이 연락을 드리곤 했다.


또 하나 놀랬던 것은 어떤 것이든 내가 선물하는 것은 달가워하신 적이 없다. 신혼 때는 거의 거절하셔서 다시 들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긴장도 되고 조심스러워 그땐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이 가만가만히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을지 모른다.


매주 주말에는 시댁을 갔는데, 가서 저녁을 먹거나 시부모님과 외식을 하거나 했는데, 그런 일상이 때로는 불편했다. 주말이라 우리끼리 데이트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쩌다 2주에 한 번 가면 너무 오랜만이라고도 하셨다. 오라면 가야지, 어른이 말씀하시니 듣는 것이 맞다고 받아들였기에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남편에게 이런 내 마음을 전달한 적은 없다.


결혼 후 1년 반 동안 노력했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내 공부를 위해 미국유학을 갈 때는

'여자가 잘나면 남자가 무능해진다.'

미국에서 입덧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살이 계속 빠져갈 때

'입덧은 모든 여자가 다 한다. 나는 열 달 내내 했다.'

애 낳고는 '애한테는 모유가 좋다더라 모유 먹여라.'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겪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그렇다는 말 그 자체였는데 그 말들은 어록처럼 쌓여, 문득 떠오를 때마다 야속했다.


친정엄마는 무슨 말을 해도 남는 게 없는데, 시어머니의 한마디는 왜 자꾸 의미를 되새기는지 알 수 없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8개월 무렵부터 우리는 매일 싸웠다.

이제는 시어머니의 집에 들러 밥 먹고 가라는 연락에 답하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문자가 와도 응답하지 않았다.

긴장하고 신경 쓰던 시부모님께 대범한 반항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던 우리는 매우 많이 서툴렀다.

개성 강한 두 사람은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싸움은 매일의 일상이었다.

싸울 때마다 남편은 우리 부모님에게, 나는 시부모에게 이혼하겠다며 대못을 박았다.

어리석고 미성숙한 우리가 여기저기 깎여야 할 일들에 늘 양가 부모님을 끌어들였다.

불효에 총량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시기에 온갖 불효를 저지른 셈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기 싫었고

잠에서 의식이 깨나는 순간부터 굳이 힘들게 살아갈 필요 없다는 생각의 돌림노래가 끝이 없었다.

반복되는 괴로움과 일상이 된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낳은 아이가 예뻐 보인 적이 없었으니, 산후 우울에서 그냥 우울로 진행했던 것일지 모른다.

남편, 남의 편, 나를 옭아매는 이 사슬을 끊고 싶었다.


밑바닥까지 보이며 싸워왔기에 그 어렵던 시부모님께 더 이상 예를 갖추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될 테니 말이다.


시어머니께 이혼한다는 통보를 하면 나의 예의 없음과 몰상식함을 직면한 시부모께서 우리의 이혼에 동의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고, 부모가 동의한다면 저 사람이 이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는 나에게 늘 싸움의 원인이었는데 이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 하는 옹벽 같은 존재였다.

내 삶의 문제에 어떤 방법도 길도 열어주지 않는 그냥 벽 말이다.


신촌에 E 라는 쌀국숫집에 어머니는 미리 와 계셨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고 말없이 먹었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어머니는 입을 여셨다.

'안된다. 안돼. 네 십자가야. 네가 질 십자가다.'

'싫어요. 그 십자가 안질 거예요. 제가 왜 어머니 아들을 키우며 살아야 합니까?'

'네가 싫다고 해도 안돼. 그냥 조금만 참고 살아라 부탁이다.'

'애들을 생각해서 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제 인생이에요.'


어머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신 분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나를 쳐다보시며 단호히 내뱉는 말들이 비수로 날아와 꽂혔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나간 나도 그런 것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 내 부모님이 지켜보셨으면 몇 대 쳐 맞을 만한 태도로 내 할 말을 서슴지 않고 주장하며 어머니의 말문을 막았다.


한 동안 오고 간 설전 끝에 내 진심이 느껴지셨는지, 한참을 한숨만 쉬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셨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다. 너무 오냐오냐했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며 키운 내 잘못이 크다.

내 아들이 고생을 안 해보고 편하게만 살아와서 너를 고생시키는구나.

내가 미안하다. 그냥 조금만 참아보면 안 되겠니.'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했던 나는 어머니와 쌀국숫집을 나오며

어머니, 버릇없는 저를 용서하시라고 정말 죄송하다하였고

어머니는 나에게 내가 다 잘못했다. 정말 미안하다 하셨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의 선은 조금씩 따뜻하게 바뀌어 갔다.

기대 대신 이해로, 오해 대신 유연함으로


어머니도 나도 서로에 대한 기대를 모두 내려놓게 된 결투였다.

며느리에 대한 기대, 시어머니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나를 가장 많이 이해해 주는 인생 선배로

내 아들과 살아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며느리로 서로에게 감사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신촌역을 지날 때면 그날이 생각난다.

서로의 쌍권총을 날리던 그날 이후

어머니와 나는 찐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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