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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Im Nov 21. 2019

료안지와 젠

임승진, 2018

결혼하면서 약속한 게 있다면 삶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중간에 가볍게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여행에 익숙해져 갈수록 간절한 휴식에 가까웠던 의미는 줄어들고, 짐도 간소해져 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엔 아내랑 여행을 가도 둘이 합쳐서 작은 백팩과 18인치 캐리어 1개를 넘지 않는 것 같다.


최근엔 구체적인 계획 없이 비행기 티켓만 2달 전에 구입하고, 출국 전날 책 한 권 사서 나가는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다. 현지에서 Airbnb로 숙박할 곳을 찾고, 여정을 즉석으로 계획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처음엔 귀중한 해외여행에서 시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막상 즉석 여행을 해보면 오히려 꼭 봐야 할 건 다 보고 올 수 있고 현지 사정을 보고 선택하다 보니 불필요한 여행지는 애초에 안 가게 되었다.


좌충우돌한 기억들이 남아 여행을 더욱 여행처럼 만든다. 사업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는 방식과 일단 사무실 밖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환경에 맞춰가는 방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든 잘 모르면 귀 얇아서 나쁠 게 없다.


여정을 정할 때도 명소나 유명 맛집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니까..' 들판이나 동물이 많은 곳으로 간다던지, 평소 관심을 가지던 철학과 연결되거나 히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건축물을 보는 것이 좋았다. 정말 사랑할 수 있는 한 장소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낼수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색과 휴식이 가능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지역을 옮길 때마다 매번 비슷한 성당을 가는 여행은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여행이 내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생각 없이 다녔던 것 같다. 그저 남들이 다녀온 명승지를 답사하는 것을 목표로 다녀온 것 같다. 그래서 세바시에서 세계여행을 통해 인생이 바뀌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행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여행에서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바라보며 느낀 점이다. 일본은 변기 위에 세면대가 달려있어서 변기 물을 내리면 손 씻을 물이 흘러나온다. 이걸 보자니 평소에 물 엄청 아끼시는 할머니도 생각났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절약에 민감하구나. 경차도 많고 집도 작고, 변기 물까지 허투루 쓰지 않네.. 그럼 왜?라는 생각이 따라온다.


회사를 운영할 때도 지나고 나면 당연한데 당시엔 '왜 이렇게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드는 결정들이 있다. 보편화된 시스템의 조각들을 맞춰 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있어왔던 수많은 투쟁에서 대대로 승리한 방식을 의미한다. 지금의 보편성은 과거의 구습을 상대로 승리한 것.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토에 있는 료안지라는 관광객이 적은 돌 정원을 갔었다. 개인적으로는 인기 많은 금각사나 청수사보다 이 곳이 훨씬 가치 있게 느껴졌었다. 료안지에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돌의 개수를 세어본다. '정원에 15개의 돌이 있는데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14개까지만 보인다'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세어보고 '정말 그렇네~'라고 이야기한다. 작은 정원에 돌무더기가 있고, 그 앞에 앉아 이 숫자와 돌의 배치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심오한 표정으로 돌을 응시한다. 단순한 사실이지만 돌의 모양과 높이가 제각각이라 서로를 반드시 1개쯤은 가리게 되어있다.


나조차 돌무더기를 바라보게 만드는 이런 스토리가 Zen (선)의 정수라고 생각하여 비교적 인기 없는 이 곳까지 방문을 했던 것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니 이런 스토리는 방문을 후킹 하는 역할만 할 뿐, 정말 유의미한 것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서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 아닐까? 함께 앉아 돌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파워풀한 돌멩이라니... 바위에 의미 부여하는 실력을 보니 일본인들이 편집샵에 강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료안지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느꼈다. 츠타야는 일본에 관심도 없던 나를 도쿄로 이끌었고, 료안지는 나를 다시 한번 일본으로 이끌었다. 이 정원은 이런 연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 같다. 비싼 돌을 써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의미를 궁금하게 만드는 돌이라서. 그리고 여기에 정말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본다.


눈 앞에 있는 진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흔한 것들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 하느라 바빠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 놓치기 전에 스스로 사색할 시간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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