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정병 #영화 #외로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5년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봤다.
외로움 돌려막기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중간중간에 납득하기 어려운 multicultural 함이 있었지만(어떻게 5번 만나고 청혼함?) 적당히 흐린 눈 했다. 사실 여자가 나오기 전까지 3번 정도 졸았는데, 저런 내용이 나올 때마다 제대로 각성이 되어 감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토니의 마른 습자지 같은 얼굴에 대비되는 에이코의 도드라진 눈모양이 좋았다. 나는 매번 이러한 설정을 집어넣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뻔뻔함을 느낀다.
나는 러닝타임 내내 어떤 생각에 머리를 잠식당해 있었다. 그 생각은 내게 연가시처럼 들러붙어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공 토니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면서 ‘저 남자…눈밑지방재배치를 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에 줄창 잠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장인지 뭔지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데, 나의 집중력도 매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역시 외모정병은 자아를 지배하고 맥락을 압도한다. 그곳이 조선시대든 2차 세계대전을 하는 중이든 가리지 않고 역병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필드를 제압하고 턴을 마친다. 이게 심해지면 만 원짜리 지폐를 보고서도 세종대왕 중안부가 기네 짧네 한다.
선택적 지각 (Selective Perception) :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선별적으로 수용함. 특정 측면에 집중하고 다른 측면은 무시하는 경향을 말하며, 종종 편향된 해석과 고정관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알바생이 죽은 에이코의 옷방에서 옷을 입어보고 우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나는 토니가 그렇게 하길 바랐다. 완전히 돌아버릴 때까지 거기 갇혀서 옷들을 만지고 입어보고 뒤집어쓰고 냄새를 맡고 그 짓을 멈추지 못해서, 끝내 누군가 그 옷들이나 토니 그 자체를 강제로 박살 내버리는 사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토니는 미치지 못한다. 그의 순수한 욕망은 상실이기 때문이다. 상실은 그의 근원이자 재능이다.
하지만 에이코에게 옷방이 더 이상 찰 수 없을 때까지 차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길 바랐다. 욕망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욕망이 전부인 사람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 전부를 버리고 잃고도 계속되는 것이 삶이라면, 외로움도 잃을 수 있겠지. 외로움이라는 감각이 내게서 버려질 때까지 버티고 버텨서 끝내 잃어버리고야 마는 그러나 동시에 죽음조차도 가지게 되어버린 에이코의 몸짓을 나는 높이 산다. 나는 내 열망이 나의 없음을 증명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옷이 아니라 윤곽주사나 인모드에 중독되었으면 환불을 받지 못하므로 자살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옷을 사는 게 낫다. 그게 아주 최악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억제되고 소진될 욕망이라면, 손안에 쥐어지는 무언가가 매번 나를 생으로 돌려놓겠지. 그 반대로 가고 싶을 때마다.
외로움을 돌려막는 짓을 그만하려면 결국 나 자신과 먼저 끝장을 봐야 한다. 나에게서 빠져나간 부분이 공허함으로 치환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러니까 배우자로서 토니는 차라리 이치와 도리에 역행할지라도, 그녀의 소비를 화끈하게 장려하는 방법으로 갔어야 했다. 갈 데가 백화점뿐인 줄 아는, 문명과 자본의 이기를 모르는 돈알못 예술충의 무지 또한 그녀가 초장에 잡아줬더라면. 세상의 재미를 서로 한 땀씩 떠먹여주며 감았던 눈을 뜨고,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쾌락으로 점철되어 현백 자스민으로 타락하는 토니가 나는 보고 싶다.
결국 나의 결핍을 이해하려면 남의 결핍도 이해해야 한다. 많이 이해하는 것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될까? 사랑에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타락도 불사해야지.. 훗날 이 부부가 각종 추심과 개인회생, 정직한 상환절차, 노역을 통해서 인생의 낭만을 모조리 깨뜨리는 시간을 통과할지라도, 토니 너는 타협하지 말고, 불같이 뭐든 사랑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