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신계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병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성적인 우울과 기능 이상에 시달려온 사람들은, 아무리 병식이 좋다고 해도 땅 속성 증상(에너지를 겸비한 충동)과 어둠 속성 증상(실행능력이 결여된 감정혼란)을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다. 즉, 여러 무림고수들이 난다긴다하는 이 바닥에서 병식 하나만으로 레전드급 환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약의 부작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단약의 유혹을 떨쳐내는 것, 그런 뜨거움을 컨트롤할 수 있는가에 따라 앉을 자리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 티어에 따라 각자 맡은 자리에서 주증상을 전담마크하기 시작한다. 특히 우울계와 충동계에 조예가 깊은 환자는 긴급증상이 발생했을 때 불타는 실행력을 살살 마사지해가면서 병가 혹은 반차를 내고, ‘필요시 약’을 핑계삼아 정신과 예약을 앞당기곤 한다. 최대한 멀쩡해 보이는 자세로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며 불안 + 공황 서브무기 붙잡고 다음날 바로 정신과 골인한다. 가까스로 일상을 컨트롤하는, 여기까지가 실버 티어 정신병자의 루틴이다.
브론즈급 정신병자의 하루를 들여다 본다. 일단 예약 없이 워크인으로 병원에 입성한다. 은은한 피아노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좆같은 케이팝 피아노 버전이 대기실의 불안을 더욱 고조시킨다. 물 한잔을 따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우울할 땐 뇌과학, F코드 이야기...떡볶이... 한 때 천상계를 주름잡았던 책들이 꽂혀 있다.
정신계 사람들을 보아 하니, 대기실에서도 각을 잡고 있다.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 그들의 머릿속을 해킹한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 정신에서는 아무 일상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머릿속 메시지를 들여다본다. "뭐라고 설명하지? 어디까지 말해? 그냥 정신병 살포해버려? 환자답게 확 그냥..." 폰을 보는 척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카톡만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아…이 나이 먹고 의사양반에게 칭얼댈 수는 없다. 사나이답게 강하게, 진면목을 보여주기로 한다. “예린님 2번 진료실 들어오세요.”
문짝에 비친 나의 어정쩡한 바지핏이 무안하다. 털거덕. 문을 따고 들어간 진료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의사양반이 옷차림을 흘끔 훑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위생상태를 견제하는 것도 이젠 익숙하다. 당연히 위생은 생략했다. “그… 저번에 처방받은 약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오늘의 턴은 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한다. 평소 같았으면 침묵으로 리더쉽을 보여줬을 터. 나의 정상적인 기세에 흠칫한 의사가 대답한다. “How are you?(저번에 한 달 치 약을 주지 않았느냐?)"
침을 한번 삼키고, 주먹에 힘 불끈 쥐고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한번에 다먹었습니다” 의사양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타이핑을 시작한다. 당연한 수순, 철로에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진료실을 통과한다. 흐르는 눈물은 억제한다. 몇 개를 먹었는지, 스트레스 촉발 원인은 뭔지, 저 근데 괜찮아요. but it feel's like jot. 그런 뻔한 말들. 그리고 주어진 아티반 다섯 개. "Have a good day..." 어쨌든 갑자기 들이닥친 것치고는 상당히 지지적인 의사의 모습에 감읍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평소보다 슬림한 약 봉투를 들고 정신과를 나선다.
주치의가 건넨 인간적 훈훈함은 잠시뿐, 긴급면담이 끝나고 병원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묘한 후회가 시작된다. 난 이 끔찍한 기분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반복된다. 자백, 아니 고백하자면 내 인생은 통째로 감염되었다. 모든 것을 먼저 고백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그날 이후 만나게 되는 것은 민망함 뿐이다. 부족한 쇼맨쉽, 다양성 떨어지는 퍼포먼스... 나름의 정신 제압에 자신 있었던 인간인데, 고작 보여준 것은 기분안정제 앞에 바짝 엎드린 나약함이라니. 심지어 알프라졸람도 아닌 아티반, 디아제팜이라니. 정신계 생활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정해진 예약일 외에 주치의를 만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정신세계는 단 하나의 액션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급진적인 병원 방문은 신중해야 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 너무 의지하면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이쪽 생활을 매듭지을 것이다. 정신계 만고불변의 진리는 혼자 일어서야 한다는 것. 빌게이츠, 앤드류 후버만, 러셀 바클리, 니키 미나즈, 글렌 가바드, 윈스턴 처칠이 와도 주먹 쎄게 쥐는 건 나의 몫이다.
어쨋든 도발적인 병원 방문 이후 나는, 다방면의 자존심이 얄쌍하게 조져지는, 일종의 똥손명가 피벗효과를 만나게 된다. 익숙한 지난번 루틴을 되짚는다. 길거리 구석에 들어가 주머니를 뒤져 전자담배를 한입 문다. 부는 바람에 비염이 고조되고 있다. '아, 집까지 또 언제 가냐…'. 뜨거운 골목을 가르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마랑 야구모자 사이가 간지러워서 긁고 있는데, 배낭을 멘 외국인이 지나간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경비는 어디서 충당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