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잘린 여자

성인 ADHD 이야기 (2)

by 돌만두





백화점 명품관에서 판매직으로 일할 때였다.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 곳이었다.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서 아주 의욕이 있었다. 하루죙일 서 있어서 무릎과 발바닥이 아팠지만, 첫 월급을 받고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어서 신이 났다.


누가 들으면 웃긴 액수겠지만 고작 20대 중반에 이 정도를 벌 수 있다니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출근하기 전에 돈 벌 생각을 하면 고된 하루를 무난히 버틸 수 있었다. 한 번은 마음이 넉넉한 어떤 연예인에게 왕창 팔았던 적이 있는데, 그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배고픈 것도 모를 정도였다.






백화점에서는 주로 피아노를 제멋대로 치는 것 같은 노래가 나왔다. 그런 음악을 재즈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있는 모든 게 한 덩어리로, 치밀하도록 교묘한 엇박으로 느껴졌다. 틈만 나면 닦아지는 바닥은 라미네이트처럼 반짝거리는데, 직원화장실에 있는 변기는 수압이 약해 항상 똥이나 휴지가 걸려 있었다.


거기서 등을 돌려 내가 일하는 층으로 가면, 에스컬레이터를 중심으로 흙내음이 섞인 우디 향수 냄새가 엄청 진했다. 그런데 창문이 없어서 점점 모호해지는 시간감각을 느끼는 와중에 그 냄새를 맡자니 내 몸이 덩굴에 갇히거나 땅에 꽂혀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오래 서 있는 것 빼고 나머지는 괜찮았다. 직원식당에 가는 길이 하필 쓰레기장 옆이어서 밥먹기 직전에 쓰레기 냄새를 맡는 일, 화장실이 어디냐는 말에 60번쯤 대답해 주는 일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거기다 나는 분명히 사치품을 잘 파는 재능이 있었다.


매출이 뛰는 날엔, 이 세상에 지금껏 보여주지 못했던 1인분을 드디어 증명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갈 때 몸이 힘들면, 힘든 만큼 그 하루가 자랑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떳떳하게 돈을 버는데, 내가 나를 이렇게 잘 먹여 살리는데, 얼마나 기특해, 내가 이렇게 강한데! 근데 3개월 뒤 잘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여기저기서 미움을 받고 있었다.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게 당연하듯이, 털끝 하나로 곱절만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운 점이 있다고 해서 미움받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데, 돈을 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구나. 그건 남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구나. 앞뒤에서 들려오는 모든 말이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정말, 정말로 억울한 일이 있었다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나도 남을 맘 편히 무시하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똥밭에 구르고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야지. 내 것이 아니었던 현금을 싹싹 긁어모아서, 든든한 뒷배로 니네 썩 꺼지라고 소리를 쳐야겠다. 가질 거 다 가진 다음에 세상을 본격적으로 미워해야지.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줘야지.







퇴사했으니까 이만 억울함을 묻어버리는 일,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얇고 가느다란 상처를 낸 손님들, 그리고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던 사람들. 그들은 문을 긁어대는 개처럼 속을 벅벅 긁어댔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으로 복수의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종종 일하는 꿈을 꿨다. 꿈에는 유독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손님들이 등장했다.


기억나는 사람은, 내 명의로 직원 할인을 해 줄 것을 요구하는 빨간안경 손님이었다. 깎아줄 수 있는 거 다 아는데 왜 안 깎아주냐고, 너네는 할인받는 거 다 안다고 억지를 썼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팔짱을 걸고 손깍지를 꽉 끼면서 몸통을 비벼댔다. 입냄새가 났다. 안 깎아줄거면 서비스라도 달라며 애원했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있지도 않은 직원가를 부르짖으며 얼굴 바로 앞에서 지랄법석을 떨었다. 저런 꿈을 꾸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마음을 떨쳐내려고 한동안은 귀신 들린 것처럼 주제에 맞지도 않는 비싼 물건을 사러 다녔다.







하지만 사라진 인류애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인간 본연의 천진함을 잃어버린 대가로 강한 멘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스트레스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트라우마는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멘탈이 엄청나게 세다고, 정신적 맷집이 좋다고 해서 격투기 선수가 될 수는 없다. 젊을 때 사서 고생하고 싶으면 악력기를 하나 사서 팔씨름 고수가 되는 편이 낫다. 타인과의 지지적 관계가 중요한 거지, 본인 맷집이 좋다는 것을 확인해서 어디다 써먹을 건데?


강한 멘탈은 절대 돈 버는 고생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정신력이 강해진다고 해서 세상이 아늑해지는 일은 없다. 마음고생의 대가를 바라는 순간, 세상은 나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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