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ADHD 이야기 (3)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처음 깨달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 기질적으로 불가능한 일 중 하나였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납득 불가능한 것에 대해 납득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하곤 했다. 두 번째는 모든 정신현상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생각은 태어난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고, 동기에는 믿음이 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내 믿음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왜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지.
수많은 우울삽화에 몇 년을 투병하며 삽질을 하고 나니 첫 번째와 두 번째 깨달음 위에 서는 세 번째 깨달음이 있었다. 받아들이는 것과 기꺼이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 이 사실이 그려낸 프랙탈 모양의 모호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기꺼이 진실의 아가리가 트여버렸고 그것을 트위터에 글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상은 깨달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약 일 년간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며 여러 번 모순적인 마음에 부딪혔다. 그 핵심에는 나의 글을 인용해서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사람들로부터 생겨났다. 하나씩 말하자면 ‘병을 정체성 삼는다’, ‘자신을 모에화한다’, ’성인임에도 과거에 집착한다’는 말들이다. 나의 글로 말미암아 그렇게 추측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닉네임을 바꾸고, 더 이상 병원 다니는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판을 심리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들로 말해 보려고 한다.
‘병을 정체성 삼는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타인이 나를 보고 김밥이라고 생각하면 김밥이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이다. 김밥이든 어묵이든 타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신경 쓸 일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정신병자’라는 정체를 밖으로 내보인다고 해서 ‘패션 우울증이다’, ‘정병을 정체성 삼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한 경멸의 언어이다. 한 연구에서는 정서표현 억제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 표현을 불편하게 경험한다는 결과가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질병이나 취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를 자신의 약점에 매몰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나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라는 관념을 바탕으로 누군가 그 약점을 긍정적으로 다루거나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여기면 반동적 자기혐오, 혹은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모에화한다’ 라는 비난이다. 나 말고도 다른 자기 고백적인 트윗들의 인용으로 수 없이 봐온 말인데, 이 또한 타인을 향한 멸시를 드러내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로 타인의 세계를 본다. 특정한 행동이 ‘모에화’로 여겨지는 사람의 세계에는 ‘자기 표현을 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기애를 드러내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또한 타인의 자기개방을 과도한 자기애적 행동으로 재해석해서 비난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 ‘나댄다’라는 말이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거나 숨기는 사람들은 타인의 정서 표현에 더 민감하게 불편을 느끼거나, 그 표현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쉽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탓을 한다’라는 말은 트라우마 상담 얘기를 하면 꼭 따라오는 말인데, 이건 본인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본다. 몸에 상처를 입으면 낫길 바라듯이, 사람은 누구나 해결되지 못한 감정을 꺼내서 해결하려는 욕구가 있다. 심리학에서도 과거 경험의 재해석과 통합은 성인기의 중요한 발달 과제라고 말한다. 즉 과거를 꺼내는 것은 퇴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또한 문화적으로 보면,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사회적인 조화가 중요하고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개인이 감정을 억제할 때가 더 많고 그런 자기억제를 긍정적으로 보기까지 한다. 즉 ‘자기 탓이 아닌 남 탓을 한다’라는 관점은, 이 정도 고통은 너도 나도 똑같이 겪은 것이며, (본인이 그렇게 어른이 되었으니) 너도 어른이라면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썩 보기 좋지 않다’는 표현은, 안타깝게도 지나친 자기억압으로 인해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위험하다고 학습된 경험이 반영되는 말이라 판단된다. 결국 ‘남 탓을 한다’는 말은 자기표현을 부정적으로 보는 문화적 시선이 반영된 평가일 뿐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다.
고백하건대 저런 말은 내가 속으로 해 본 말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못된 인간이라서? 아니, 감정을 드러내면 상처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렇다. 어쩌다 보니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해는 나를 향한 용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심리상담에서 눈물 짜내며 얻은 깨달음들이 돌고 돌아 나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저런 말들에 괘념치 않는다. 자신을 표현하고 본인이 가진 병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맥락이다. 사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말하기를 주저하는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나는 정신이 아픈 사람들이 뜨개질이든 복싱이든 요리든 뭐든 간에 ‘자기비난’ 이 아닌 자신의 언어를 찾기를 바란다. 결국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나대지 않고,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할 것인가? 누구 좋으라고? 밖에서는 비위 맞추고 빌빌거리며 살아도 자신에게는 그러지 말 것을 권한다. 살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거침없이 택해라. 난 그 방법으로 내 상처를 묘사하는 글쓰기를 택했다. ‘병을 정체성 삼는다’고? 상처를 안 보이게 은폐해서 낫는 게 아니듯이, 드러낸다고 해서 밝혀진 것들이 내 전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타인이 그것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 누구든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언어로 살아남아야 한다. 이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설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