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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사 May 24. 2021

영화 <사도>, 보기 전 알면 좋을 지식들 (6)

마지막 편- 사도세자의 탄생비화

얼레벌레 탕평정치를 이끌어가고 있는 영조로 지난 편이 끝났다.

그리고 지금 작성하고 있는 이 글(6편)이 <사도> 보기 전 알면 좋은 지식들...이거 어떻게 줄이지? 어쨌든 사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오늘은 딱 사도가 태어난 이야기까지 하고 글을 마무리할 예정. 

여담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난 편에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시기(연도)를 설명하지 못한 걸 이제 봐버렸는데... 그래서 덧붙이자면, 지난 편에서 마지막으로 서술한 신유대훈 때까지만 해도 사도세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시리즈는 사도 분석 글이 아니라, 보기 전 알면 좋은 글이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대가 느려터진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 정말로. 


다시 영조 즉위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때 영조는 꽤 젊었다. 94년생인데 24년도에 즉위했다. 딱 서른한 살. (지금은 21년도니까 91년생(레드벨벳 아이린 나이)이 즉위한 것. 살다 살다 아이린과 영조를 비교하다니... 어쨌든 요정도의 파릇파릇 젊은이로 생각하면 되겠다. 

현재 한국인이라면 결혼 적령기라고 보이겠지만 당연히 조선시대는 아니다. 영조는 즉위할 때만 해도 아들이 있었다(과거형). 숙종 45년, 영조가 아직 연잉군일 때 태어났다. 즉위하면서는 아들에게 '경의군'이라는 군호도 주었고, 다음 해 세자로 책봉했다. 우리가 아는...?이라고 하기에는 사실 사도세자 형으로 더 잘 알려진 효장세자이다. 세자 책봉을 늑장 부린 이유는 영조가 즉위할 때는 아직 상중이어서였다는 듯(영조 즉위년 9월 23일 기록).

뽀작(2016년도 방영한 SBS 월화드라마 <대박>의 한 장면)

어쨌든 이 세자, 아주 괜찮았다. 젊은 시절 낳은 아들이라 영조가 자리만 잘 잡고 있으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서 번듯하게 왕권 안정에 도움을 줄 아들이었다. 일곱 살에 세자로 즉위했는데, 세자 즉위식 예절을 깨꼬롬하게 잘 따랐다는 기록을 보면 똘똘하기까지 한 듯. 어쨌든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는 아주 칭찬 일색이다. 아주 으으른이랑 똑같았다 한다(영조 4년 11월 26일 기록). 

하지만 사도가 왜 태어나자마자 세자가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효장세자는 사도가 태어날 때 즈음엔 세상에 없었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자는 영조 4년 11월 18일 사망한다. 10월 28일부터 병에 들었다는 기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영조는 또(!) 여기서 삼다(인삼차)를 쓰려고 한다...연잉군 시절 경종에게 부자&인삼차 올려서 난리 났을 때의 그 인삼차 맞다.

이 정도면 그냥 영조가 인삼에 진심이다...

이때 환후가 날로 위중해져 가므로, 임금이 기품(氣稟)이 본디 청약(淸弱)하다 하여 삼다(蔘茶;인삼차)를 쓰려 하였으나, 약원 제도들이 번조(煩燥)한 것을 염려하여 귤피죽여탕을 청하였는데, 끝내 결정하지 못하였다.

어쨌든 4년 11월 8일의 기록이다. 영조가 삼다(인삼차)를 쓰려 하자 약방 관원들이 열만 오를 것을 걱정해 다른 약을 쓸 것을 건의했는데, 둘 중 뭘 처방할지는 결정하지 못한 듯 싶다. 

이 이후 겨우 일주일을 넘긴 11월 16일 세자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당시 세자의 나이 10살(현재 기준 2012년생 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자가 병든 10월 바로 한 달 전인 9월 그의 입학(入學; 성균관 입학)·관례(冠禮; 성인식)·가례(嘉禮; 혼인)가 겹쳐 좋은 일이라며 별시를 열었던 것이다. 안타깝..

 

한 번 병들어 낫지 않은 채 오래 끌게 된 뒤로 설사를 막고 어지러움을 돕는 데에 의약이 효험이 없으니, 탄식하며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는데 잡되게 여러 약을 써보면 괴로움만 가져올 뿐이니, 다시 약을 쓰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 안정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남은 기록은 영조 4년 11월 26일의 기사로, 세자 사후 영조가 직접 세자의 행장을 지어 승정원에 내린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병이 심해질 때 "약이 어차피 들지 않으니까 괜히 쓴 약 먹어 힘들게 하는 것보다는 포기하고 천명에 맡기겠습니다"라는 의미로 말한 듯싶다. 


고작 세자 자리에 2년 앉아 있었던 세자였다. 심지어 기록상 똘똘하다고 영조가 아주 예뻐 죽고 못 살던 세자. 그리고 이 시기는 이인좌의 난(앞서 이야기한 무신란)으로 골머리를 썩히다 해방된 지 겨우 반년이 지난 때였다. 영조의 멘탈이 안타깝다. 영조의 삼재인 해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삼재 계산 너무 복잡해서 포기했다. 삼재 계산기 사이트 들어가 보니 1900년 이전은 지원을 안 해주더라. 이건 17세기에 태어난 영조 탓이다... 




어쨌든, 이렇게 허망하게 세자를 잃고 나서 영조의 후계자 자리는 오랜 시간 공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는 1735년, 영조 나이 마흔다섯에 본 아들이다. 젊을 때 아들 보고 이후로 줄줄이 공주만 보다가 이젠 또 낳을 수 있는지 정자의 건강이 아슬아슬할 정도에 겨우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세자의 친모는 영빈 이씨이다. <사도> 작중에서는 전혜진 배우가 열연하셨다. 청룡영화상과 올해의 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도 수상하셨다. 작중 아주 좋아하는 포지션의 좋은 연기를 보여주신 배우라 말이 길어졌다...^^... 배우분 말고 본체로 다시 들어가자. 


영빈 이씨는 영조의 자녀를 가장 많이 출산한 후궁이다. 

참고로 영조는 본처(정비)인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사이가 남보다 못할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를 들일 때는 이미 호호할아버지였으니, 후궁 중에서만 자식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영빈 이씨는 여러 명의 공주와 사도세자를 낳았다. (앞서 말한 효장세자는 정빈 이씨에게서 본 자녀이다!)

이렇듯 자녀 수만 보아도 영조와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궁 지위도 승은을 입어 봉해졌다(후궁은 간택해서 정식 절차를 거쳐 들어오는 간택후궁과 승은을 먼저 입은 궁녀 출신인 간택 후궁으로 나뉜다). 이때 승은을 입은 후 낳은 자녀가 영조의 세상제일이쁜이인 바로바로 그 화평옹주. 


게다가 영빈 이씨는 내명부 품계 중 숙의(종 2품)->귀인(종 1품)->영빈(정 1품)의 단계를 거쳐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까지 올랐는데, 봉해진 당시는 왕실 어른의 상중이었다(!) 

1730년 11월 27일의 일인데, 경종비 선의왕후의 상(喪) 직후였다... 당시 영조의 이러한 노빠꾸 때문에 여론이 들썩이긴 했나 봄. 책봉하면서 길례에 입는 옷까지 입게 하였다. 

귀인 이씨를 봉하여 영빈)을 삼았다. (중략) 
이때에 인산(因山; 왕실의 큰 장례)이 막 끝나자 온 나라 사람이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서울과 지방에서 놀랍게 여겨 탄식하였다.

참고로 영조와 선의왕후 어씨의 사이는 안 좋았던 것으로 현대에 들어선 추측하고 있는데, 이걸 감안하고 보면 싫어하는 사람은 온몸으로 싫어하는 영조니까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영조가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를 들 수 있는데... 글의 주제에 엇나가고 작중에도 나오니 영화에서 감상하세요!


하지만 영빈 이씨에게도 (구시대적) 고민은 있었으니 바로 딸만 줄줄이 낳은 것. 우리집 딸내미 입장에서 이런 문장을 쓰다니 통탄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쟤네는 18세기 인간이니까...

어쨌든, 계속 후계자 자리가 공석인&나이 들어가는 영조는 1733년엔 급기야 기도라도 해 보자고 건의한다. 

약방(藥房)과 영상(領相; 영의정)·우상(右相; 우의정)이 청대(請對; 왕과 만나길 청함)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영빈 이씨가 연달아 네 명의 옹주를 출산했고 또 임신했으므로 남아를 출산하는 경사가 있기를 상하가 기축(企祝)하였으나, 어제 또 옹주를 출산하였다. 대신들이 임금께서 실망하여 지나치게 염려할까 두려워하여 각기 위로와 면려의 말을 진달하였다.
송인명이 고매(高禖;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비는 신(神)의 이름)에게 빌고 명산(名山)에 기도하는 등의 일을 앙주(仰奏; 삼가 아룀)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 일 때문에 침식(寢食; 먹고 자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다만 삼종(三宗; 효종~현종~숙종 혈통)의 혈맥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뿐이다."하였다.

1733년(영조 9년) 3월 8일의 기록이다. 참고로 이때 또 출산했다던 옹주는 바로 화협옹주...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와 함께 별로 사랑받지 못한 옹주라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옹주만 줄줄이 나오니 대신들이 신께 기도라도 해 보자 했으나 나 그렇게 맘상한거 아니라고 애써 괜찮은 척하는 영조의 모습이다.

이 사람 보면 볼수록 섬세하고 은근한 것이 2000년대 발라드 가사가 따로 없다. 


어쨌든 이 눈물의 쑈쑈쑈 이후 결국 낳게 된 원자! 바로 사도세자이다. 

영빈 이씨가 원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 왕세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중략)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1735년 1월 21일의 일이다. 

이때 영조의 나이가 당시 기준으로 꽤 나이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후게자로 이 원자를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했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서류상으로 후궁인 어머니 영빈 이씨가 아니라 정성왕후 서씨의 아들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직계 적장자(세자)가 아닌 대군/군 등이 왕위를 이을 경우에는 서류상으로 선왕 왕후의 양자로 입적되는 것이 원칙이었음.)


어쨌든, 신명 난 영조는 바로 다음 해(!) 3월, 겨우 걸어다닐랑말랑한 애기를 세자로 책봉시켜 버린다. 어느 정도의 baby일지 궁금하다면 14개월 아기 발달 검색해보세요. 

사실 세자 책봉이라는 것이...와 얘가 세자!! 하고 딱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날 이후로 '정식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 후계자 공부도 해야 하고, 잠도 혼자 자고... 어쨌든 겨우 걸어 다닐 애긔애긔가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이다. 

뭐 이 때는 사실 성인의 기준이 지금보다 나잇대가 매우 낮아서, 앞서 세자들도 이른 나이에(6~10살) 책봉되는 경우가 많기는 했다. 하지만 14개월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파격적인 게 맞다... 작중에도 이에 대해 영빈 이씨가 세자의 정서를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별 것 아니지만 스포일러니...)


어쨌든 아들이 태어난 것은 간당간당했던 영조에게 큰 축복이었다. 그렇지만 이 현대인이 보기에도 다급한 세자 책봉과 교육의 시작은 비극의 시작점과 동일했다. 영화 속에서도 시강원 관리들에게 교육받고 있는 세자가 꽤...너무나...어린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세자가 태어난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한다. 

이 시리즈가 대강 앞서 사도의 탄생 배경과 과정 그리고 똘똘한 효장세자(aka사도세자 형)의 그림자에 대해 좋은 참고자료가 되었기를 바라며... 

<사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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