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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Dec 07. 2017

엄마가 되면 엄마 맘을 알까?

네가 애를 낳아봐야 엄마 맘을 알지.


결혼 전에 몇 번인가 들었던 말이다. 주로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했을 때 핀잔처럼 듣게 된다. 아마 많은 딸들이 엄마에게 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의 너는 모르지만,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 소위 '엄마 마음'이 뭔지를 알게 되어 지금 엄마가 왜 이러는지를 이해할거라는 말. 자식을 생각하는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엄마에게 반발할 때 방어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미묘한 말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딸을 낳은 엄마가 되었다. 아직 저 대사를 아이에게 할만큼이 되지도 않았고, 그럴 일도 없지만, 내가 아이를 낳고 나니 그놈의 '엄마 맘'이란 것을 더 모르겠다. 이러다 터지는게 아닐까 의심스러울만큼 불러오던 배, 내 몸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아 당황했던 일, 무서운 출산 등의 생경한 경험을 지나 만나게 된 작은 아기는 정말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 사랑스러움에 반응해서, 아기를 위해 날 잠시 접어두고 올인할 만큼의 벅찬 마음이 내가 비로소 '아이를 낳고 알게 될 것'이었다면, 엄마 맘을 알게 된다는건 거짓말이 아닐까?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소중한데 왜 그랬지?


그랬다. 나는 엄마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그 벅찬 자식 사랑의 세계 한복판에서, 나의 엄마의 마음을 알긴 커녕 의아해하고 있었다. '엄마도 내가 이렇게 예쁘고 소중했겠구나'가 아닌,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하는 의문. 그리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까지.


모르긴해도, 많은 엄마들이 친정 엄마를 롤모델로 아이를 키우겠노라 다짐하기 보다는 그 반대로, 혹은 그와는 다르게 키우겠다고 다짐할 것이라 생각한다. 충분히 공감적이고 애정이 넘치는 엄마의 보살핌으로 자라,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운좋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기에 마음 한켠에 늘 결핍이 있었다. 그 결핍은 내 성격의 일부에 영향을 끼쳤고, 내 태도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갑갑한 맘을 풀고 싶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심리학이나 심리상담, 미술치료 등에 기웃대며 책을 읽고 나름의 공부를 했다.


나는 왜 이럴까?를 화두 삼아 미술치료 이론 및 자기성장 강의를 듣다가 실습과정을 밟으며 미술치료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삶의 여러 변화 또한 겪었다.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내적 질료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왜 같은 상황에서 특정 방향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그리고 그런 사고와 행동이 나를 어떻게 살도록 이끌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책으로 보고 머리로만 알았던 것들이 내면 작업을 하며 미술작품 속에 휘감겨져 나오는 모습에 신기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이제는 자존감 만큼이나 흔한 용어가 되어버린 그 '내면아이'를 달래주고, 엄마가 나에게 준 결핍을 대물림하지 않고 내 대에서 끊어내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마음을 치유하는 분야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애착'이다. 엄마(혹은 주양육자)와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가 아이의 성격 형성과 관계 맺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는 애착이론은, 내담자가 가진 문제를 파악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육아의 세계에 들어서도 지겹도록 듣게 되는 말이 또 애착이다. 애착 형성을 잘해야하니 이렇게 저렇게 해주라, 불안정한 애착 유형으로 자란 아이는 훗날 이러저러하게 된다는 둥의 메세지가 날아든다. 애착 형성을 잘하지 못하면 불행한 삶으로 가는 티켓을 자동 예약이라도 하는 것만 같이 들린다. 그토록 중하다는 애착 형성을 위해, 엄마들은 온갖 육아서를 보고 공부를 해가며 뭔가를 하려고 하지만, 늘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푸념으로 끝을 맺기 일쑤다.

아기란 존재가 빽빽 울고 말을 잘 안 들어 다루기 어려워서만이 아니다. 나 자신이 불안정 애착 유형이라 관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해서 그렇다. 아기와의 관계도 엄연히 관계다. 일방적으로 보살핌을 주는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상호작용을 하며 내 무의식적 패턴대로 대하게 되는 독립된 대상이다. 그래서 물리적인 힘듦과 별개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 때 내 문제가 도드라진다. 아이를 통해 내 문제를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나 역시 그 과정을 걷고 있기에, 그간 배운 것, 느낀 것, 경험한 것, 공부한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나처럼 아이를 키우며 '이렇게 예쁜데 엄마는 왜 나한테 그렇게밖에 못했지?'라고 되물으며 슬퍼하는 엄마들에게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각자 처한 상황도, 경험과 기억도, 저마다의 사연도 모두 다르지만, 내 아이에게는 충분히 괜찮은 (good enough)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만은 같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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