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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Dec 23. 2017

강한 믿음은 짙은 그림자를 동반한다

생존을 위한 거짓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별한 행동은 아니다.


자연계의 많은 동물이 거짓말을 한다.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의태를 곤충들이 있고, 제 몸의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같은 동물도 있다. 지능이 좀 더 높은 동물은 적을 의도적으로 속여 위기에서 탈출한다. 다친 척하며 여우 등의 포식자를 꼬여내어 둥지에서 멀리 떨어뜨린 다음 날아가 도망치는 물떼새, 새끼에게도 먹이를 뺏기기 싫어 경계 소리를 낸 후 혼자 먹이를 먹었다는 북극여우, 동료들에게 바나나 위치를 엉뚱하게 가르쳐주고 혼자 숨겨놨던 바나나를 먹었다는 침팬지 등 사례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 거짓행동의 목적이 생존 혹은 먹이 등 가장 본능적인 차원의 욕구 충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매우 복잡한 동물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인간도 '자기들을 위한 거짓'을 품고 산다. 인간은 실제로 있다고 확인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어야 전쟁을 하거나 한 사회 속에서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기에 발전하게 된 것이 스케일이 큰 거짓말, 일종의 신화가 되었다’고 했다. 악의를 갖고 속인다는 좁은 뜻에서 벗어나 문자 그대로 거짓, 참이 아닌 것이란 뜻으로 범주를 확장하면, 세상은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 종교, 이념은 엄밀히 말하면 거짓이다. 인간의 개인적 필요와 집단을 잘 굴리려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생한 것들이다. 오늘날엔 온갖 이념과 종교가 넘실대고, 이는 인간의 내적 필요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는 거짓말도 결국은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다. 그 욕구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 잘 드러나지 않거나 다른 명분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지 본질은 ‘나 살겠다고’에 있다. 수만년 전 한 동굴의 우리 선조 중 누군가는 음식을 더 얻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표시하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군락이 생기고 조직된 사회가 생기면서, 그 집단의 유지를 위해 규칙이 필요하게 되었다. 몇몇 규칙이 생기고, 누군가는 지키고 누군가는 지키지 않아 징벌이 생긴다. 연장자, 샤먼, 족장 등 집단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고 이를 따르는 것이 편해진다. 분쟁을 대신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필요는 당위로 둔갑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옳다’는 공통된 명분이 생겨나면서 집단 내에는 지도자를 따르고 그가 정한 규칙을 지키는게 당연하다는 믿음이 생긴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하늘에 손을 뻗어야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류의 믿음도 생긴다. 실제로는 ‘거짓’이지만, 그 시대를 산 그들에게는 진리다. 비록 우연히 친 번개에 고목이 부러진 것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저 혼자 우기는 한 샤먼이 멋대로 정한 의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거짓’은 구성원들의 ‘아프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믿음이 되고 규칙이 된다.

신화와 종교도 그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만 스케일이 커졌다. 우리가 속한 부족이 더 특별하다는 ‘증명된 바 없는 거짓 믿음’, 이것이 진리이자 신의 뜻이라는 종교적 이념은 많은 전쟁의 명분이 되어 왔다. 전쟁터의 병사가 입은 십자군 갑옷을 보고, ‘신의 뜻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며 생면부지의 먼 나라 수도사가 상처를 치료하고 축복의 기도를 올려줄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종교적 신념이라는 같은 거짓을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종교적 신념도 파고들면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채우다보니 복잡해진 하나의 관념이다. 실제로 확인된 바 없는 것을 ‘그럴 것이라고 강하게 믿음으로써 진실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는 거짓이다.


우리가 가진 많은 관념이 사실 그렇다. 관념이 힘을 얻어 신념이 되려면 강한 욕망이 필요하다. 생명체가 이룰 수는 없지만 강하게 욕망하는 것은 ‘영생’과 ‘행복의 지속’이기에 이를 해결해준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신념은 그만큼 강력할 수 밖에 없다. 정치적 신념, 각종 정신적인 신념도 마찬가지다. 특정 정치 성향을 강하게 갖는 것엔 공의로운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거라 기대해서다. 무슨 주의를 추구하고 마음 공부를 하는 것도 겉으로는 평화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지만 본질은 내가 행복하고 싶고 그 행복을 더 길게 유지하고 싶어서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내 생존과 안녕을 위해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고, 인간의 지능이 높은만큼 많은 거짓이 잘 포장되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종 관념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 속의 메세지가 달리 보인다.

사랑받고 싶음.
살고 싶음.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외롭지 않고 싶음.
특별한 존재라고 인정받고 싶음.

그렇다면 반대로,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외롭고, 그저 그런 존재로 남을까봐, 이 생을 의미없이 살고 있을까봐 불안한 마음이 많은 종류의 ‘강한 주장’ 뒤에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주장이 강력할수록 그 안의 욕망과 그림자는 짙어진다. 각종 ‘주의자’의 저울은 본인들 생각과 다르게 기울어져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정 종교는 자기들 외엔 이단이라고 한다. 어떤 비건은 육식을 하는 이들을 미개인 혹은 죄인 취급을 한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이는 반대편을 증오하며 자기들식의 이상향만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자연주의자는 현대의학은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어떤 애착 신봉자는 아이를 엄마가 직접 키우지 않으면 아이 인생을 망쳐먹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 어떤 여성주의자는 자기들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모두 여성혐오를 앓는 미개한 종족이라고 한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의 좋은 점을 누리는 것에 집중하는지, 자기가 좇는 것의 대극에 있는 쪽의 단점을 드러내는 것에 힘을 쓰는지를 보면 저울의 기울기를 가늠할 수 있다. 한 선택의 즐거움과 기쁨만으로도 당위를 주장할 수 있는데 반대편을 난도질해야 만족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실상을 알리기 위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흔히 느끼는 ‘묘한 거부감을 풍기는 극단적인 주장’ 속엔 그렇게 비틀린 마음이 숨어 있다. 자기 에고의 생존을 위해 자기만의 신화를 신봉해서 그렇다. 자기 기반이 약할수록 믿음과 주의가 거대해진다. 일상에서도 자기 주장이 옳고 그 외의 것은 틀리거나 열등한 듯이 이야기하는 ‘쎈캐’들이 종종 있는데, 생존욕구가 강한, 여유없는 영혼들일 수도 있다. 쿨하고 멋있고 깨어 있는 존재인게 아니라.

명백한 잘잘못이 있는 일이 아닌 한은, 삶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어차피 인간은 각자의 작은 세계 속에서 자기 믿음을 공고히 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끼리 ‘그래 맞아, 우리가 잘하는거야’하고 토닥이며 모여 살고 있다. 내게 어떤 주의나 신념 등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이를 통해 내가 택하지 않은 반대편 선택지를 나도 모르게 열등한 것으로 두고 비난하고 싶어진다면, 오히려 내 현재를 들여다볼 신호로 생각할 일이다.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하는지,
내 현재를 충분히 누리고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나의 어떤 부분이 ‘살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알아봐지길’ 바라고 있는지 말이다.


나는 어쩌면 살기 위한 위장색을 두른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 괜찮다고, 잘 살고 있고 충분히 사랑 받을만하다는 말을 듣고픈 마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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