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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May 08. 2018

불안 속에서 불씨를 틔우다

불안한 노인과 함께 하기

불안은 사람의 신경계를 과하게 각성시킨다. 불안의 원인이 무엇이건, 불안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한 몸은 신체 곳곳에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세팅하는 홀몬을 돌린다. 근육이 긴장하여 언제든 뛰거나 싸울 수 있도록 하고, 불필요한 곳에까지 혈액을 충실히 공급할 이유가 없으니 말단이나 장기가 허해져 냉해지거나 수분이 부족해진다. 위액, 타액, 점액 등이 마르고 손발이 차고, 머리카락이나 피부 등의 영양이 나빠진다. 그렇게 질병이 시작된다. 내가 가진 이런저런 질환도 스트레스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짐승이 먹히느냐 도망치느냐의 생존 위기 상황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나, 사람이 ‘젖먹던 힘을 다해’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인간의 경우 생존의 위기라는게 짐승보다 복잡다단한데, 인간이 짐승보다 복잡스러운 기능(사고나 감정)을 더 가진만큼 그 위기도 다채롭다. 육체에 위협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받는 위협도 인간에게는 무척이나 큰 생존의 위기로 다가온다. 수치심으로 죽음을 택하는 종족은 인간 밖에 없다. 자아상, 자아정체감, 에고, 자존심, 자존감 그 무어라 부르건, ‘의식의 문제’는 인간에게 살맛을 느끼게 하는 만큼이나, 또 ‘죽을 맛’을 느끼게 하는 중대한 것인 듯 하다. 그러니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태에 빠지면 몸 또한 긴장하고 괴로워질 수 밖에 없다. 사랑받지 못함, 인정받지 못함, 고통, 불안, 걱정, 두려움 기타 등등 마음의 문제라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실질적으로 몸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상의 ‘생존의 위기’는 몸에도 불균형한 상태-즉, 늘 도망갈 준비를 하는 상태-를 세팅하고, 이는 각 장기와 면역 시스템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스트레스에 대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고, 정말 두 다리로 뜀박질을 해야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스트레스 홀몬이 분비되면 혈관을 수축시키고, 심박을 올리고, 근육을 긴장시킨다. 그 상황에서 속편하게 소화흡수에 에너지를 충분히 쓸 여유도, 번식에 힘쓸 여유도 없으니, 소화기관이나 생식기관의 기능은 떨어진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각종 신진대사 기능이 저하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육체적 위기’와 ‘정신적 위기’가 겹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몸도 괴롭고 정신도 괴로우면, 생존의 위협을 느껴 몸이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너무나 많은 상황이 이에 해당되겠지만, 나는 나의 아버지, 즉 질병을 안고 있는 노인에게서 이 모습을 본다. 실제로 쇠약해서 잘 기능하지 못하는 육체, 그로 인해 죽음을 피부로 느껴 두려운 정신, ‘굳건한 나’라고 철썩같이 믿어왔던, 명징했던 의식이 흐릿해져 스스로도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혼란. 이 모든 것이 다 겹친데다 본래도 불안을 안고 살았던 성격 탓에 심화된, 불안에 불안해하는 상태.
노년기의 많은 문제가 불안의 중첩, 육신과 정신의 스러져가는 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육아책은 쏟아져나와 그저그런 책이 반도 넘을텐데, 노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책은 별로 없다. 지루한 전공서적같은 것이나, 비극이나 미담, 신파로 이루어진 책은 있는 것 같다. 노인은 이러저러하다고 편견으로 보는 시각 자체도 문제다. 몸과 정신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인 인간,으로 담백하게 보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런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적는 것만으로도 내 위장을 꼬이게 하는 각종 ‘아빠의 사람 힘들게 하는 꼬장’을 겪을 때마다, 내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저 불안의 중첩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몸도 정신도 죽어간다는게 대체 어떤 느낌이란 말인가. 내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하나둘씩 사그러드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절망감은?
어렴풋이 알듯 하다가도 감정적으로 욱한 상황을 맞이하면,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는 ‘사람만 보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유기견’이라도 떠올린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불안이 뼛속까지 새겨진 유기견이 사람 발소리만 들어도 이를 드러내듯이, 사람도 아주 작은 자극에 울컥증이 도져 날카롭게 굴 수 있다. 인간도 그냥 짐승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서 울컥하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가 내 아킬레스건이다. 전신이 성감대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듯, 전신이 아킬레스건이고 전신이 역린인, 과각성 상태의 딱한 사람도 분명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주위를 아주 힘들게 한다. 그래서 주변인이 더 외면하고, 그게 또 불안을 부추겨 악순환에 빠진다. 솔직히 엄청난 인내심과 애정이 있지 않고선 이런 사람을 대하는 것은 자기 생명력을 갉아먹는 행위일 수도 있기에, 주변인에게 이를 이해하거나 수용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정말 구제불능인지 아닌지는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대하는 사람의 수용이나 유연한 대응 정도에 따르는 것이기에 무어라 말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단, 수용한다는게 자발적 헌신을 의미할 순 있어도 강제적인 희생을 의미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사건과 스토리에만 의지해선 안된다. 한쪽의 이야기만 들어서도 안된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나 기억이 있었지만, 엄마의 인생 중 내가 몰랐던 부분에 대해 알고나서 이해되거나 혹은 역으로 안쓰럽게 다가왔던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인에게 관대해지는 심리적 현상을 감안하고도 그랬다.
아빠는 일제시대와 6.25를 모두 겪었고, 전쟁통에 어린 가장으로 집안의 누이들과 그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전쟁 이상의 생존의 위기가 또 있을까? 아빠는 전쟁을 겪은 트라우마를 치유하긴 커녕 자신을 들여다볼 틈도 없이 가장 노릇을 하며 내달려왔다. 심지어 중간에 엄마 사업 부도 및 사기를 당한 위기 상황에서 가족을 지켜낸 경험도 갖고 있다. 그런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두려움에 기반한 비뚤어진 관념들을, 이제 와서 내가 ‘그건 나빠!’ 라며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는 없다. 그런 삶을 살아내본 적도 없으면서 감히 그렇게 낙인 찍을 자격이 있을까? 물론 같은 것을 겪어도 다르게 사는 사람이 많지만, 시대의 비극과 시대의 트라우마는 분명 존재한다. 이 시대의 노인은 분명 그 트라우마를 안고 있고, 치유되지 못했으며, 죽음을 앞두고 불안이 중첩된 극도의 ‘각성 상태’에 있다. 그러니 식욕도 떨어지고 소화도 안되고 늘 괴롭고 아프다. 몸이 젊으면 근육이 긴장될지라도 힘을 저장이라도 해둘텐데, 그마저도 안되니 그냥 쥐가 나거나 다리가 풀리고 만다.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을 못가니 이젠 얼어버린다. 어쩌면 노인의 흐릿해지는 의식은 자연이 허락한 ‘얼어붙기 반응’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둔감해지기라도 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엄마가 되어 아기를 키우면서, 아기에게 닿는 내 마음과 관심이 스스로도 신기했더랬다. 애쓰지 않아도 내 일처럼 아기의 희노애락에 함께 하게 되고, 아이의 반응이 뭘 의미할까 연구하려고 드는 그 애정에 스스로 놀라 ‘나도 이런게 되는구나!’하며 감격스러웠었다. 내리사랑이라더니 부모한텐 참 그게 되지 않았는데, 이제사 조금, 이미 작별을 고하고, 또 작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에 와서야 조금, 예쁘지도 않은 ‘꼬장’에 묻은 속내를 진심으로 읽으려 하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둥이라 이제 가능하게 된건지, 나이가 들어도 되지 않을 일을 부모가 많이 늙은 탓에 일찍 겪어 빨리 깨치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아는 것은, 그들이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는 것과, 나 포함 누구도 이를 해소해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를 이해하고 같이 있는 순간만큼이라도 보듬어줄 수는 있다는 것 정도다. 아빠의 몸의 증상, 마음의 뒤틀림 등이 그래서 이제 전처럼 괴롭지만은 않다. 내가 안정되면 아빠도 안정되는게 조금씩 보인다. 아이와 똑같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기에, 아뜨거 하듯이 데이는 것 같으면 제자리로 얼른 돌아와 거리를 두어 날 보호한다.

불안은 공격적인 성향을 만들어낸다. 타인에게 향하면 피해를 주는 성격이 되어 가해자가 되고, 내부로 향하면 신경증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자책하게 되어 피해자가 된다. 불안에 잠식된 이와 지내려면 아프로디테같은 면이 필요하다. 내면의 불씨를 보고 그것 하나에 사랑을 주어 틔워내는 힘은 아프로디테의 특성이다. 추남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장이 재능을 알아본 아프로디테는 그의 아내가 된다. 단 하나의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에 집중해 불씨를 살려 모닥불로 만들고 아궁이를 지펴 창조를 해낸다.

아빠가 송이 생일이라고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었다. 겉면에 ‘생신 축하!’라고 써있었다. 팔십중반 노인의 유머다. 생신이라니. 하긴 내게 뭔가 줄 때에도 ‘내 새끼’라는 표현을 적곤 했다. 아빠는 노래 가사를 받아 적고 테이프를 무한반복하며 노래 연습을 할 줄 알고, 어린 딸에게 읽힐 책을 손수 골라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사건이, 상처가 아빠를 짓눌러 ‘옆에 있기 꺼려지는 노인네’로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고자 애쓰는 밝은 면이 조금이지만 남아 있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겠다. 빛을 발견하면 희망이 싹튼다. 실제로 변화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상대 안에 있는 빛이 보인다면, 상대 뿐 아니라 내 괴로움도 객관적으로 볼 힘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빠의 불안 공격(?)에, 신체반응이 일지 않고 차분하게 넘어가고 그 후로도 평상심이 유지되어 신기한 적이 있었다. 대개 가슴이 갑갑하게 죄어오거나 배가 아프곤 했다. 몸은 정직하지만, 몸을 앞서는 것이 의식이란 것도 배우고 있다. 일체유심조는 진리인 모양이다. 물론 순간적으로 기분이야 나쁘지만, 그게 날 사로잡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작은 불씨 하나를 살려낸 것 같다. 꺼지면 다시 얻어야겠다. 생신 축하!라고 적힌 은행 봉투를, 버리지 않고 있다. 거기에 불티가 묻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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