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원영 Apr 18. 2019

아이의 놀이에 투사가 일어나는 순간

아이의 세계를 엿볼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26개월 무렵, 아이가 작은 솔방울을 큰 솔방울 위에 얹고 한 말이다. 큰 것을 아빠, 작은 것을 아기라 칭하는 것은 단지 자기가 아는 세계에 부모-나만 있어서가 아니다. 그 세계 안의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 그리고 나를 적극 투사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 낳기 전부터  사년째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어, 아이는 주말에나 아빠를 본다. 그러니 아이는 나서부터 아빠는 매일 보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안다. 두돌 지나면서 아빠에게 잘 가라고 하거나 보고 싶다는 표현을 했는데, 저런 소소한 놀이에 심정이 투영되어 ‘아빠가 아기를 안아주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남편은 그런 아이를 더 많이 안아주려고 노력했다.

아빠 솔방울이 아기를 안았어!



아이의 놀이에는 아이의 경험과 소망이 드러난다. 어릴 때라도 말이다. 아이는 분명 ‘아빠가 날 안아주고 자주 보면 좋겠다’라고 언어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솔방울 둘을 겹치며 안아줬다고 하기를 반복함으로써 그보다 더 깊은 소망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재생’했다. 놀이치료 전공서를 읽다보면, 아이의 놀이는 그 자체로 아이의 세계이고 현실로 경험된다는 뉘앙스가 자주 나온다. (아동중심 놀이치료의 대가 게리 랜드레스의 서적이 주로 그렇다) 아이는 철저히 현존하는 존재이자,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내면화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건축하고, 또 수정해나가는 꼬마 건축가이기에 그렇다. 어른처럼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기 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순수한 의도를 내어 세상과 교류하는 존재로 생동감있게 살아간다. 아이의 놀이가 아름답고 영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고 생각한다.


소망과 욕구를 재생하듯 표현하는 것 뿐 아니라, 아이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감정을 소화해내기 위해 놀이를 한다. 아래의 모래 괴물은, 아직 구체적인 형상과 표정을 만들지 못하는 아이가 내게 ‘괴물 만들어줘.’, ‘화나게 해줘.’, ‘울게/웃게 해줘.’ 등의 요구를 일일히 하며 진행한 놀이의 현장이다.

슬픈 아기를 엄마가 웃으며 안아준다


아이의 ‘싫어!’가 늘어나는 반감기에 이루어진 놀이다. 소위 미운 세 살이라고도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슈타이너의 사상에 등장하는 <반감기>라는 (내 나름의) 해석을 선호한다. 세상을 향한 인간의 내적 작용은 교감과 반감으로 이루어진다.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자면, 교감은 대상과 합일하려는 방향의 에너지고, 반감은 대상과 나를 분리하려는 방향의 에너지다. 아기가 엄마를 보고 따라 웃거나, 엄마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 세상을 모방하고 흡수하는 것은 교감의 힘이다. 반감은 대상에 대해 나만의 것을 내세워 대상과 내가 같지 않음을 확인하며 스스로의 독립성을 확인하는 힘이다. 그러니 뭐든 안되고 싫다하고 보는 미운 세 살은 반감의 힘을 키우는, 아이가 개체로서의 독립성을 획득하는 몹시 놀랍고 또 기적적인 시기다. 물론 부모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만큼 열불이 날 때가 부지기수지만, 그 속에 내재된 힘을 이해한다면 힘듦 속에서도 뿌듯한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편이 그 힘듦을 이겨내기에 유리하기도 하다.


아무튼, 바로 그 무렵, 아이는 내게 주의를 받고, 혼나기 시작했다. 무서운 표정과 말투에 와앙 울면서 나름 고군분투하는 나름의 ‘역경’에 처한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큰 고비다. 신화적 원형 속 영웅의 여정에 반드시 등장하는 ‘고난’이, 아주 작고 귀여운 고난이 아이에게도 나타난 셈이다. 아이는 놀이라는 의례를 통해 자기의 작지만 큰 생의 고난을 소화해낸다. 바로 저 놀이가 그 현장이다.


괴물 만들어줘.
엄마 괴물 화나게 해.
아기 괴물이 울어.
엄마 괴물이 웃어.
엄마 괴물이 아기 안아줘.
아기 괴물 웃어.

이 과정에 내 개입은 전혀 없었다. 아이의 시나리오대로 모래를 뭉쳐 괴물을 만들고, 표정을 그렸다 지우고, 안아주는 모양새의 팔을 덧붙인 것이 다다. 아이는 그 놀이를 주도하며 만족한 듯 보였다. 일상에서 화난 엄마에게 혼났다가 다시 안아주며 감정 조절을 하고 함께 웃었던 과정을, 놀이를 통해 재생하며 다시금 내적인 자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놀이가 처음 일어났을 때, 나는 무척 벅찬 감정을 느꼈다. 혼내지 말아야지 하는 반성의 마음보다(나는 꽤 수용적이고 안정적인 타입의 엄마다), 아이가 스스로를 내적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힘을 키우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런 놀이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나온다. 놀이법을 따라서 뭘 하거나,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할 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놀이는 그 자체로 아이의 표현이자, 자기치유적인 의례이자, 자기 세계의 반영이다. 요즘은 엄마들이 교육 운운하며 자꾸 규격화된 놀이법을 해놓고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학습이지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자발적이고 목적이 없을 때 창의적이고 창조적이며 치유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놀이다.


많은 이들이 내 아이의 속을 모르겠다거나, 아이와 닿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어 아이가 기꺼이 자기 세계를 표현하고, 나아가 그 세계로 부모를 초대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이의 내적 세계는 놀이에 드러난다. 모든 놀이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충분히 자유롭고 몰입된 상태에서는 분명히 스며나온다. 이걸 발견하는 기쁨이 육아의 행복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나와 다른 존재의 언어를 이해하고(놀이는 아이의 언어나 다름없다), 이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필요한 것을 주고, 지켜보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몹시 근사하게 느껴진다.


놀이에 아이의 투사가 묻어나는 순간, 그 순간을 지켜보고 함께 하는 기쁨을 앞으로도 즐거이 누리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