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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마 Jul 15. 2019

행복의 반대말

행복에 대한 소고 

행복의 반대말은 ○○다. 

카피라이터, 작가, 인생 코치, 종교계 인사 등 여러 사람이 저 멘트를 사용했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다

일반적인 인식이자, 관념을 이해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전식 정의에 가깝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만/불평>이다.

행복하려면 일상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서 온 말로, 통찰적인 것 같지만 두 단어의 무게감이 달라서 갸우뚱했다.

행복의 반대말은 <비교>다. 


비교하고 판단하면서 불행해지기에 하는 말일게다. 역시 통찰적인 듯 보이지만 한쪽은 상태 한쪽은 행위기에 동급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행복의 반대말은 <분별심>이다.


불교계에서 나온 말로, 마음이 번뇌의 근원이라는 불교 사상이 바탕이 된다. 보다 근원적인 것에 접근한 느낌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일상>이다. 

특별할 때에만 행복을 느끼고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기에 사용한 말로, 통찰적이기 보단 카피라이팅 문구같다. 


대체 행복이 뭐길래. 모두가 행복을 바라지만 어떤 상태인지 정의하기 힘들어서 반대말 찾기도 제각각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하는게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내게 이득이 되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금방 빠져나가고 만다. 아니, 심지어 더 나쁜 상태로 가라앉기 일쑤다. 저 위에 나온 말처럼 불만을 갖고 비교를 해서, 특별한 이벤트가 사라지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뭐가 내게 좋고 나쁜지 자꾸 가리는 마음이 올라와서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면 반대로, 만족스럽기만 하면, 늘 특별하면,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나를 사랑하면 행복한건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어서 늘 행복을 찾아 다니는걸까? 


어떤 대상의 실체를 정의하기 힘들 때 주변이나 반대되는 개념을 살펴서 그 대상을 가늠하는 일은 제법 의미가 있다.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대를 찾아보는 것에 있어 슈타이너가 이야기한 '악의 반대는 또 다른 악'이라는 통찰이 방법적 힌트를 준다. 

https://brunch.co.kr/@ahala/120

우리는 배타적인 것을 나쁘게 규정하고, 이것의 반대를 수용적이거나 포용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쁜 것의 반대는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나쁜 것의 반대편엔 반대 방향으로 치우쳐진 또 다른 나쁜 것이 있으며, 그 중간 어딘가에 균형 잡은 상태의 선이 있다고 말한다. 이분법적 선악이라기 보다 빛과 어둠같은 다른 성질로 구분하는 것-한쪽은 통합하고 사랑하는 성질, 다른 것은 가르고 두려워하는 성질-으로 이해한다. 배타적인 것의 반대편엔 이도저도 아닌 것이 있다. 수용적인 것은 그 중간에 위치한다. 이도저도 아니게 대하는 것은 내 영역을 아예 만들지 않거나 내 영역을 모르는 상태다. 


나는 그 아이디어가 몹시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행복 역시 같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더 깊은 이해를 얻게 되리라고 가정했다. 요컨대, 행복의 반대엔 나쁜 어떤 것이 있는게 아니라, 치우쳐진 두 상태의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 잡고 있는게 행복이라는 접근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가운데에 두고 시소 타고 있는 양극단의 상태가 무엇인지 사유할 수 있고, 모 아니면 도의 적대적 세계관을 잠시라도 벗고 여러 상태의 스펙트럼 속에 자리한 행복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극단의 상태, 행복에서 멀어진 두 상태를 찾음으로써 내 상태를 돌아보는 것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단 행복에서 가장 먼 상태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괴로움을 느낄 때 행복하지 않다고 여긴다. 몸이 불편하건 마음이 아프건, 모두 괴로움으로 묶을 수 있다. 괴로울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마음은 '벗어나고 싶다'일 것이다. 지금 너무 괴로우니, 얼른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당연한 일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희망을 꿈꾸고, 괴로움을 덜어줄 방법을 찾아다닌다.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은 행복한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벗어나고 싶은>을 한 쪽 끝에 두었다.




벗어나고 싶은 - (행복과 매치되는 어떤 균형적 상태) - ???



그렇다면 벗어나고 싶은 상태가 점점 옅어지면 어떻게 되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이대로도 괜찮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점점 현재로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게 아니라 내 자리에 존재하며 느끼고 경험한다. 우린 행복할 때 그 상태를 즐기고 누리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고 잊어버린다. 소위 말하는 현존,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상태가 절로 일어난다. 


다른 반대편으로 가보면, 이제는 괴로움과 달라 보이지만 치우쳤다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는 새로운 상태를 마주한다. '벗어나고 싶은'게 아니라 '벗어나기 싫은', '계속 있고 싶은' 상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내게 즐겁고 유익한 상태가 계속되길 기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행복에서 벗어나기 싫어지고, 세상사 좋기만 하길 기대하며 이를 추구하는 또다른 치우침이다. 내 자리 밖을 갈망하는 것 반대편엔 내 자리만을 갈망하는 것이 놓여 있는 셈이다. 



벗어나고 싶은 - (행복과 매치되는 어떤 균형적 상태) - 좋기만을 바라는


집착의 반대는 또 다른 집착이라는 말이 있다. 해탈을 꿈꾼다며 에고의 집착을 놓는다는 이들은 해탈에 집착한다.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힐링을 찾다가 힐링에 집착한다. 손가락 끝에 수저를 올리고 수평이 되는 균형점을 찾으려 할 때 조금만 엇나가도 기울어지듯, 균형은 찰나고 치우침은 너무도 쉽다. 


좋은 것만 바라는 것은 괴롭기 싫은 상태의 거울상이다. 괴로워서 괴롭기 싫으냐, 기분이 좋으니 괴로워지기 싫으냐의 차이다. 둘 다 괴로운걸 두려워해서 존재하는 상태다. 하지만 기분이 좋을 때는 그 상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치우침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즐거운걸 누리지 않고 터부시하라는거냐,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잘못된 태도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좋은 상태를 놓기 싫은 마음의 저항이다. 사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이 인식은 행복을 방해하거나, 좋은 상태에서 끌어내리는 것과 무관하다. 오히려 집착을 놓고 행복감을 삶 전반에 스밀 수 있게 돕는 인식이다. 


내가 어떤 좋은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한껏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상태가 지속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기 시작하면 또다른 치우침이 생긴다. 너무 좋아서 벗어나기 싫어지면, 그 기쁨이 사라진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불행의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좋은 상태가 사라진 일상에서조차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좋은 상태에 중독되고 일상, 현재와 단절된다. 벗어나고 싶은 상태도 좋은 기분 속에 계속 있고 싶은 상태도 <단절>이다. 삶의 민낯을 수용하지 않는 단절. 좋기만 하면 좋겠다는 유아적 소망은 궁극적으로 삶을 분절시켜 좋을 때는 세상 천지 날아갈 것 같다가 그게 사라지면 상대적으로 더 괴로워지는 조울증같은 상태로 몰아간다. 힐링계가 장사가 되는 이유는 사람들을 좋은 상태, 편한 상태에 중독시키기 때문이다. 분별력을 발휘할 일이다. 


행복의 반대는 단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행복감은 연결감과 관계가 있나보다. TRE가 내 몸과 나의 연결을 꾀해서 나 자신의 내면과의 연결, 외부와의 연결로 확장시키는 치유적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과도 통한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내가 내 삶 전반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연결은 사람들과 좋은 말을 주고 받거나 교류를 많이 하고 같은 것을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상태에서 연결감을 잘 못 느낀다. 내가 진심으로 대할 때가 아니면 스스로 비위 맞추는 소리하는 것이 느껴져서 되려 단절감을 느낀다. 혹은 내 결핍이 채워지는게 좋아서 당장 달게 느낀다는게 인식이 되어서 성급하게 달려든 것 같이 머쓱해지기도 한다. 대신 대부분의 교류를 할 땐 진실된 태도와 마음으로 하는 편이다. 바람직해 보이는 상태에 있느냐 아니냐 보다, 내 마음의 정직한 정도가 내겐 더 중요하다. 그 내적 상태와 외적 표현이 일치할 때 나는 나 자신과의 연결감을 느낀다. TRE 그룹이나 각종 단체 모임에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속에서 '그 정도는 아닌' 날 발견할 때마다, 다들 이렇게 연결감을 느낀다거나 감동을 표현하는데 나는 왜 덤덤할까 고민했었다. 고무적이고 감동이 흐르는 상태가 마치 '훌륭한 어떤 곳에 도달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때 피하지 않고 그대로 스스로를 지켜보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타인의 감상은 그들의 것이고, 표현 방식도 그들의 것이니 나는 나대로 진실하게 있는 것이 더 그라운딩된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게 더 연결감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타인의 상태에 반드시 동의하거나 똑같이 느껴야만 연결된다 여긴다면, 내가 나만의 느낌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수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기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개인의 내면에 행복을 향해 나아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살고자 하고, 편안하고 싶어한다.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해도 마지막까지 놔버리지 않는다. 거기엔 일종의 애달픔이 있다. 부모님에게서 그걸 보았고 그 안엔 경건함마저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구나 하는, 인간의 가장 속알맹이를 만나서 실체를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가진 경건한 본성이다. 


아무튼, 내가 그렇듯이 상대도 건강하고 행복하고 싶어하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온전히 알아 근원적인 공감이 일어날 때 느끼는 연결감이 내가 추구하는 연결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너도 나도 다 마찬가지야, 우린 모두 행복하길 바라는 사랑스러운 존재야,같은 예쁜 마음이 절로 들 수 있다. (아기를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이 조그만 녀석도 자기 욕구가 있어서 떼를 쓰네? 할 때, 떼쓰는 행위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랑받고픈 마음을 느끼면서 사랑스러워지는 것) 여기서는 위로나 찬사, 도움과 나눔 이전에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수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슬픔이나 고통도 온전히 느끼고 그 속에 머무른다. 괴로워 벗어나려 하는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목격하고, 상대의 경험을 내 것처럼 느껴 같이 할 수 없는 분리된 존재라는 것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부모님을 떠나보낼 때 가슴 찢어지도록 느꼈던 슬픔이다. 이별보다 슬프고 괴로운건 사그라드는 엄마 아빠가 겪는 그 어떤 것도 내가 덜어줄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들이 자식 아플 때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다'는 말이 절절한 사랑에서 나왔다는걸 그때 알았다. 사랑은 좋고 행복한 것만이 아니라 슬픔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상대 옆에 있어주는 것, 내 괴로움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상대의 아픔과 함께 있는 것임을 그때서야 알았다. 그게 아픔 속에 있는 상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공감이자 위로다. 지지한답시고 사연에 빠져 편드는 것은 존중이나 공감이 아니라 자기연민적 투사라 건강치 못하다. 



(현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 좋기만을 바라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현존하는 것과 통한다. 현재에 존재하며 과거나 미래에 의식을 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 현존할 때 우리는 삶과 연결된다. 작게는 내 몸과 연결되고, 크게는 삶 전반, 세상과 연결된다. 행복은 그 과정에서 오는 소소한 만족감과 고양감을 모두 포함한 상태다. 현존하기에 느끼는 고통도 딸려 온다. 고통을 외면하는 행복은 그 결이 다르다. 내 입에 맞고 심신이 편해서 좋고 아름답지, 싫고 괴로운 것까지 포함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책임지는 삶은 내게 단 것만 삼키지 않는다.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대홍수가 나서 노아의 방주에 한쌍의 동물이 바삐 올라타고 있었다.  선이 방주에 타러 갔지만 짝이 있어야 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짝을 찾을 수 없어서 고심하다가, 숲 속에 홀로 있는 악을 만났다. 선은 악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짝을 이루어야 방주에 탈 수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악과 함께 방주에 올랐다. 그 후부터 선이 가는 곳엔 언제나 악이 따라다녔다  <탈무드>


유대인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에 나오는 일화다. 빛과 어둠은 늘 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삶도 마찬가지다. 좋기만 하고 싶다는 욕망은 그래서 치우침이다. 


행복은 나와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이다. 좋기만 해야 행복이라면, 편안하고 힐링스러운 것만 행복이고 사랑이고 지복이라 여기는 믿음은 '좋기만 한 천국'을 믿는 모종교의 순진한 원형과 다르지 않다. 현대판 천국의 묘사일 뿐 두 원형은 완벽하게 같다. 뉴에이지가 이 원형을 벗어나지 못하는걸 보면 별로 뉴에이지도 아닌 듯 하다. (전혀 안 새롭잖아!)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좋을 때 그 상태가 지속되길 바라는 것 모두가 치우침이며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푹 젖어 머무르는 경험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배우고 있고, 배워갈 것이다. 


성경에는 누구든 아이같은 마음이어야 천국에 이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교회에선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를) 믿고 따르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이용하지만, 그 속뜻은 아이처럼 기쁨도 슬픔도 생생하게 느끼면서 현존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살 때 그것이 곧 행복한 천국이라는 뜻임을 의심치 않는다. 아이는 매순간 충실하게 온 존재를 던져서 경험하지 않는가. 아이가 최고의 구루인 이유다. 


행복의 반대말은 내 사전에서는 단절이 되었다. 현존치 못하는 상태, 내게 다가온 것들을 존중하지 않고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려는 욕심이 삶과 나를 단절시키는 가장 큰 장애같다. 보다 낮아지고 받아들임으로써 고양되고 삶과 함께 흐르게 되는 신비가 어딘가에 있는 듯 하다. 나도 그 여정에 있겠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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