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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원영 Jun 15. 2018

선과 악, 균형과 치우침

‘배타적이다’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 대개 ‘잘 받아들이거나 잘 섞이는 개방적인 면’을 떠올릴 것이다. 배타적인 것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고, 그 반대는 좋은 것이니 수용적이라는 긍정적인 단어가 생각난다. 이런 사고가 이중성의 사고다. 모 아니면 도, 좋은 것이 아니면 나쁜 것. 이중성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그렇다. 엄정한 국어능력을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념 속에서 쉽게 선택하게 되는 개념을 따라가보면 이런 식이다. 비겁한 것의 반대 개념도 긍정적인 용감함이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배타적인 것, 즉 나만 옳고 남은 틀리다며 선을 쨍하게 그어버리는 것의 반대되는 개념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게 섞어버리는 것이다. 상황의 부당함 앞에서 나만을 위하며 숨어버리는 비겁함의 반대 개념은,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태인데도 정의를 외치며 나대는 만용이다.

즉, 우리가 흔히 나쁘다고 여기는 상태의 반대적인 상태는 역시나 나쁘다. 악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또다른 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선에 해당하는 바람직한 것은 어디에 위치할까?

배타적인 것과 이도저도 아닌 것의 중간에 선이 위치한다. 배타적인 것처럼 경계가 경직된 것이 아니지만 경계는 있고, 외부의 것도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서 받아들이는 수용하는 것이 그 중간에 있다.


배타적인 - 경계가 명확한 -
수용하는 - 이도저도 아닌


그런데 여기엔 재밌는 특징이 있다. 중간의 경계가 명확한 구역에서 수용하는 성질이 없으면 배타적이 된다. 수용을 하는데 경계가 명확치 않으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즉, 선은 경계가 명확할 때도 있고, 수용할 때도 있는 가변성과 균형 위에 존재한다. 경직되거나(배타적), 흩어져 무의미해지는 것(이도저도 아닌)이 양극단에 있다. 슈타이너는 이 양극단의 것에 악을 상징하는 루시퍼와 아리만을 대입하여 속성을 비유했다. 선은 흐름 속에서 균형을 잡고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살아 움직이는 속성을 가진다.

비겁함과 만용도 마찬가지다.


비겁한-신중한-용감한-만용의


신중한데 용감하지 않으면 비겁해진다. 용감한데 신중하지 않으면 만용 상태가 된다. 악은 선의 부재, 즉 유연하게 어떤 특성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경직될 때, 그리고 마구 남발할 때 드러난다. 선과 악이라 표현해서 거부감이 든다면, 치우침과 균형이라 해도 좋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두면 세상의 많은 현상이 어디에 와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에 도움이 된다. 이런저런 주의를 주장하다보면 그 개념과 맞지 않는 것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생긴다. 비건은 육식을 나쁘게 말하고, 정신세계를 중시 여기는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나쁘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양극단에 있다는 점에서부터 벌써 치우침이고 중간의 선/도/균형을 잃은 상태다. 그래서 어떤 ‘주의’는 늘 기울어져 있다. 주의를 따르려면 다른 쪽을 시소 반대편에 올려야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유연함이 시소를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시소는 움직이라고 있는 것이고, 세상 모든 에너지도 흐르는 것이 진리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개념이다. 그렇기에 강한 주장과 주의일수록 그림자가 짙고 불균형한 무지와 교만, 마야(환영)에 속한다.


그럴수도, 저럴수도 있는 세상의 유연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상태는 그래서 정체되어 있고, 병들어 있다. 치우친 상태에서 인간의 정신은 건강할 수 없다. 건강한 상태는 어딘가의 끝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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