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이해하고 안정감을 주는 법
뇌가 발달 중인 아이와, 뇌가 퇴화 중인 노인을 동시에 보며 희비를 느끼느라 혼의 진동을 실컷 경험 중인 요즘. 아이와 노인이 시소 양 끝에 앉은 거울상이란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처럼 실감한 적은 없었다.
아이의 뇌는 생존의 뇌(뇌간)부터 시작해서 회로를 형성하며 변연계와 신피질까지 발달한다. 마치 진화해온 인류의 뇌가 밟았던 과정을 재현하듯, 주변과 상호작용을 하며 뇌 속에 도로를 죽죽 낸다. 반면 노인의 뇌는 반대로 신피질부터 ‘죽어간다’. 실제로 별다른 병이 없다해도 노인들은 뇌세포가 파괴되어 전체 뇌중량이 줄어든다고 한다. 늙으면서 인지와 판단 기능이 감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합리적인 생각은 줄고 감정적인 판단이 두드러진다. 신피질의 기능으로 공감이나 인간 관계 속 연결감을 지속할 수 있는데(social engagement) 이것이 흐려지니 생존의 뇌가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많이 갖게 되어 ‘경계하고, 불안하고, 의심 많은’ 불안한 상태로 가기 쉽다. 노인이 되면 까탈스러워지는 원인은 심리적인 상실감 뿐 아니라 뇌의 실질적 기능 변화에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아이와 노인의 뇌는 생성/퇴화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신피질과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뇌간과의 연결이 강해 자기중심적이고, 안전한지 여부를 계속 탐색하여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참을성이 낮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감>이다. 안정감도 필요하지만 안전감이라 적은 이유는, 정서적인 것보다 일차적인 생존(몸의 편함, 먹고 자고 싸는 일) 욕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필요를 충족할 수 없는 아이와, 스스로 자기가 해오던 자족적인 일들을 점점 할 수 없게 되는 노인은 모두 일신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마음을 어루만져도 배가 고프고, 기저귀가 축축한 아이나, 몸이 아프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정말로 ‘편하게’ 할 수는 없다. 반면 성인은 몸이 좀 고되더라도 정서적 지지가 있으면 스스로 힘을 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라운딩(Grounding)
- 접지, 현존 등으로 번역되며,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며 안정된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신경계의 부교감신경이 작동하여 심신이 차분해지도록 스스로 조절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몸 두드리기, 심호흡, 명상 등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기본적인 안전이 제공되면, 안정감의 단계로 올릴 수 있다. 아이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등 잘 보살피면 아이는 여유가 생겨 그 에너지로 주변의 사물과 사람을 적극 탐색하고, 반응을 즐긴다. 기분과 감정이 섬세히 분화되기 전인 아이가 불안정해서 보챌 땐 신체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급선무다. 아주 아기일 땐 대부분이 그렇다. 혹은, 신경계가 불안정 상태에 있어서 약간의 자극에도 반응할 수 있다. 임신한 산모의 불안정 상태가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아이를 돌보는 이의 상태 또한 그대로 전달된다. 아이가 좀 더 자라 감정도 또렷해지고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불안정한 상태를 달랠 때 좀 더 다양한 방법을 쓸 수 있다. 내 경우엔 우선 아이를 안아 달래면서 셀프 그라운딩을 한다. 나의 안정감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괜찮다고 속삭이거나, 부드러운 터치로 달래면서 나도 숨을 고르고 자분자분 걷는다. 아이를 달랠 때 다들 본능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흔들고 두드려주는데, 이 또한 그라운딩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잦아들면 창가로 가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평소 아이가 보고 말하던 것들을 하나씩 읊는다. ‘저기 옆집이 있네, 차가 지나가네, 가로등이 있네.’ 하며 아이가 시선을 돌리게 한다. 이 때 아이 눈에 뵈는게 없으면 아직 몸을 더 안정시켜야 하고, 반응하면서 사물의 이름을 말하면 성공이다. 신피질까지 연결이 회복된 것이다. 방금 전에 그 방법을 사용했고, 아이는 자지러질 듯 울다가 진정했다. 아이는 할아버지를 보면 가까이 가지 않는다. 몸으로 신경계의 불안 상태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할아버지 댁에 다녀오고, 본인은 잠이 부족해서 짜증도 났어서 겹친 것 같다. 어린이집을 가는 등의 환경 변화도 한 몫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순 없고, 중요한 것은 ‘조절(regulation)’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신경계 각성 상태(스트레스 반응)에서 다시 안정 상태로 돌아오는 회로를 뇌가 습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가 보채고 떼를 쓸 때 같이 당황하거나 짜증내는게 아니라
1. 신체적 안전감을 우선 체크
2. 어른의 그라운딩
3. 리드미컬한 토닥임이나 따스하고 부드럽게 조이는 포옹 등 안락한 신체 감각 제공
4. 감정 읽어주기
5. 신피질 연결 회복을 돕기 위해 주변 사물에 관심 돌려 말해보기 (가능한 경우에)
등의 순서를 차분히 밟는 편이 현명하다. 실제로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치료사가 함께 걷거나, 심호흡을 하는 몸작업에서 시작해, 주위에서 특정색의 물체를 찾아보게 하거나, 구구단을 묻는 등 인지하는 뇌로 연결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안다. 뇌와 신경계 각성 및 안정의 기전은 모두 동일하기에 애어른 할 것 없이 본질은 같다. 단, 발달 상태나 신경계 불안정 상태에 따라 응용이 다를 뿐이라 생각한다.
반면, 노인은 판단하는 뇌와 감정의 뇌를 평생 충분히 사용하다가 그 연결이 흐려지며 신경계가 쉬이 불안정해지는 쪽인데다, 신체적으로 편해지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서적 안정을 꾀하는 터치와 함께 속감정을 읽어주는 공감을 더 큰 비중으로 두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신피질이 ‘합리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편이 낫다. 내 경험상 그랬다. 신경계 저 위에서 각성상태로 불안해하는 이에게 어떤 논리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 감정이 어떻다는 둥의 감정적 호소도 튕겨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도 내 그라운딩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렵지만 점차 나아지는 중이다.
최근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듣는 이까지 지치게 하는 반복된 레파토리 속 절망감을 읽어 비정상적인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해 받았다는 생각에 불안이 조금 누그러진다. 죽음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빠에게 ‘지금 아빠가 다른 음식도 못 먹을까봐 또 겁이 나는거구나.’, ‘뭐가 어떻든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다 죽기 싫지. 다 무섭지..’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고 그런 말 말라거나, 오래 사셔야죠-같은 말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젊은 나’는 죽음의 절망, 공포 등을 마주하기 싫어 외면하고 싶겠지만, 노인에겐 그것이 곧 자기 현실이고 자기 세계다. 짐이 되니 미안하고 거부 당할까 더 두려울 마음에 대고 ‘갈 때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괴롭게 있다 가야지. 미안하면 좀만 더 힘내봐. 내가 아빠 딸인데 뭐가 걱정이야. 나같은 딸이 어딨어.’ 등등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는 말을 한다. 감정뇌가 누그러들면, 그때서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한다. 실제로 이러이러한 것이 참 다행이고 고마운 것이라고. 그러면 납득하면서 실제로 안심한다. 효과는 오래 가지 않고, 그 과정까지 내 에너지는 많이 든다. 모시고 산대도 싫다고 거부를 하니 도리가 없다. 아무튼,
1. 나부터 그라운딩하기
2. 몸으로 따스함 전하기
3. 감정을 읽어 안정감 주기
4. 연결감 회복을 위해 이미 알고 있는(새로운 관념의 주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객관적 사실을 확인) 긍정적인 것들을 하나씩 상기시키기
의 순서로 대화한다. 끊어져 있던 연결이 회복될 때의 안정감은 생각보다 크다.
이런 저런 관찰과 주워들은 것들로 꿰맞추어 현실에 적용해보니 위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육아는 일찌감치 그라운딩 상태로 했었지만 아빠를 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여전히 힘들다. 그럼에도 방법을 찾아가고 있고, 아빠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나와 닿는 경험을 많이 하길 바란다. 아빠는 불안으로 살아왔고, 괴로움을 하소연하는 방법이나 남을 통제하는 것 말고는 사람 대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엄마와도 따스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비틀린 습관이 더 굳어졌다. 어쩌면 하소연하는 노인들은 그것 말고는 관심 받을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일런지도 모른다. 아빠에게서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내 어릴 적에 아빠는 나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반면 엄마는 나와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난 아빠가 구제불능의 괴팍한 늙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너무도 불안하고, 따스함을 느끼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련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 마음이 전달되어 아빠는 요즘 내 손을 잡고 연결감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가시기 전까지 딸이 있어 그래도 따스했다, 고 느끼면 족하다.
아빠를 만나러 가기 전엔 나도 몸이 괴로워진다. 어쩔 수가 없다. 가기 싫단 생각도 들고 인상도 써진다. 아빠가 싫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모사하는 중인 상태를 보는 것도 괴롭고, 같이 있으면 나 역시 각성 상태가 되어 머리가 아프거나 내장이 긴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심호흡을 하는 등 그라운딩 작업을 한다. 내가 안정될수록 아빠도 안정되는 것이 보인다. 여전히 힘들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내 강한 힘이라 믿는다. 내가 힘들어지니 아이도 흐트러진다. 어쩔 수 없다. 대신 잘 조절해준다. 늘 좋은 상태로 있을 순 없다. 얼마나 잘 알아차려 제자리로 돌아오느냐가 중요하다.
뇌와 신경계, 신경계의 공명, 자기조절과 그라운딩, 몸의 감각 좇기 등 여러 개념이 참 많은 도움이 된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 위 내용은 다미주신경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에 적용해본 글쓴이의 주관적 경험이 담겨 있는 것임을 알립니다.